
|스마트투데이=김나연 기자| 벤처투자 업계에서 바이오와 ICT·제조는 ‘물과 기름’ 같은 영역이다. 전문성이 극명하게 갈려 바이오 심사역은 IT를 낯설어하고 테크 심사역은 임상 데이터를 부담스러워하는 칸막이 현상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범준 대교인베스트먼트 이사는 이 경계를 허무는 인물이다. LG전자 하드웨어 엔지니어 출신인 그는 바이오와 딥테크(비바이오) 포트폴리오 비중을 1대1로 유지하며 독자적인 투자 영역을 구축해왔다. 베테랑 심사역인 그에게 투자 방정식과 유망 섹터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물었다.
● 승자독식의 테크 vs 백가쟁명의 바이오
김범준 이사가 바이오 섹터에서 매력을 느끼는 지점은 ‘시장 구조’에 있다. 그는 테크가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독점의 무대’라면 바이오는 수많은 기술과 자본이 공존하는 ‘백가쟁명’의 장이라고 설명했다.
검색 엔진 시장을 구글이 장악하고 GPU칩 시장을 엔비디아가 독점하듯 테크 산업은 표준을 선점한 1등 기업이 후발 주자의 기회를 원천 봉쇄하는 구조를 띤다. 이 판에서 스타트업이 거대 기업을 이기기는 매우 어렵다.
반면 바이오는 다르다. 일라이릴리, 노바티스, 화이자, 머크, 아스트라제네카 등 시가총액 100조원에서 수백조원에 달하는 글로벌 빅파마만 20~30여곳이 공존한다. 아무리 거대한 제약사라도 인류의 모든 질병을 홀로 정복할 수 없고 암 하나만 해도 수십 가지 세부 치료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범준 이사는 “바이오 벤처기업이 특정 모달리티/파이프라인에서 경쟁우위만 보여준다면 잠재 수요처인 빅파마만 수십개에 달한다” 라며 “이러한 이유로 바이오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가 여전히 매력적인 기회” 라고 강조했다.
투자 회수(Exit) 관점에서도 그의 셈법은 명확했다. 모바일 서비스나 플랫폼 기업이 상장 문턱을 넘는 것은 확률적으로 높지 않은 반면 바이오/헬스케어는 기술특례상장 제도를 통해 매년 10~20개 기업이 꾸준히 증시에 입성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VC 입장에서 투자 대비 회수 성공 확률만 놓고 본다면 바이오 산업이 매우 높은 섹터”라고 설명했다.
물론 확률을 얻는 대신 치러야 할 대가도 있다. 바이오는 매출 없이 R&D 비용만 계속 태워야 하기에 끊임없는 자본 확충이 필요하고 이 과정에서 창업자와 초기 투자자의 지분은 계속 희석된다. 이에 대해 김범준 이사는 “지분 희석 탓에 투자금 대비 회수 배수(Multiple)는 낮을 수 있지만 엑시트가 제한된 다른 섹터에 비해 ‘확률’이라는 확실한 무기를 쥐고 가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확률’ 위에서 그가 발휘하는 핵심 전략은 바로 바이오와 ICT 포트폴리오 비중을 균형 있게 유지하는 ‘하이브리드 전략’ 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양쪽 산업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통해, 서로 다른 기술과 시장이 교차하는 접점에서 새로운 투자 기회를 모색한다.
이러한 시각이 빛을 발한 대표적인 사례가 큐리오시스와 쓰리빌리언이다. 두 기업 모두 바이오 진단 및 분석을 목적으로 하지만 그 구현 방식은 광학 장비와 AI 알고리즘에 기반을 둔다. 김범준 이사는 “이 기업들이 분석하고자 하는 대상은 생명공학인데 이 기술을 만드는 팀원들은 대부분 공학 전문가들”이라며 서로 다른 전문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투자 기회를 포착했다고 설명했다.
● K-방산의 미래···미사일 잡는 레이저와 가성비 드론
그렇다면 김범준 이사의 본진인 제조업 섹터에서 그가 주목하고 있는 분야는 어디일까. 최근 그가 가장 깊이 파고드는 분야는 방산과 우주 항공이다. 삼성탈레스(현 한화시스템) 연구소 시절의 경험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기술적 디테일을 포착하는 무기가 됐다. 대표적인 것이 Fast & Fine Steering Mirror(FSM) 기술이다.
저궤도 위성이나 드론 통신에 쓰이는 레이저는 수천km 밖의 목표물을 정확히 맞춰야 하는데 이때 무거운 레이저 장비 자체를 움직이는 건 비효율적이다. 김범준 이사는 반사 거울을 미세하게 조절해 빔의 각도를 제어하는 것이 FSM 기술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유도 미사일이 영상 인식을 하며 날아오는 시대에 전투기가 레이저로 미사일의 눈(센서)을 멀게 하는 방어 기술은 한국 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고부가가치 영역”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하드웨어의 고도화뿐만 아니라 ‘전쟁의 경제학’ 변화에도 주목했다. 수백억원의 양성 비용이 드는 파일럿을 보호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공격형 드론’이 전장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그는 “50만원짜리 자폭 드론 수천 대를 띄워 그중 일부만 목표를 타격해도 전쟁의 승패가 바뀐다”며 고가 장비인 파일럿과 전투기를 대체할 가성비 높은 공격형 드론 시장의 성장 잠재력을 높게 평가했다.
그는 무기 체계의 국산화가 단순한 애국심의 영역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전쟁 중 수입이 끊기면 국방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부품 국산화는 필연적이며 한 번 채택되면 수십 년간 유지보수와 교체 수요가 발생하는 안정적이면서도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이라는 분석이다.
● K-에스테틱의 본질···“영업이익률 50%의 제조업은 없다”
최근 세계적으로 열풍을 끌고 있는 K-뷰티와 에스테틱(미용 의료)에 대해서는 확실한 현금 창출원으로 평가했다. 김범준 이사는 한국의 피부 미용 업계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수출 제조업’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피부 미용 시장 규모는 세계 4위 수준이며 치열한 내수 경쟁이 오히려 해외에서도 통하는 압도적인 가성비와 품질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는 국내 시술 가격이 해외의 3분의 1 수준이라는 점을 들며 이 경쟁력이 장비 수출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완성했다고 분석했다. 김범준 이사는 “미용 의료기기 업체들의 영업이익률이 40~50%에 육박한다”며 “제조업에서 이 정도 마진을 내는 섹터는 사실상 전무하다”고 강조했다.
김범준 이사는 이러한 수익성이야말로 자본 시장의 ‘큰 손’들을 움직인 핵심 동력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베인캐피탈이 클래시스를 인수한 것을 비롯해 제이시스메디칼, 비올, 루트로닉 등 주요 플레이어들이 연이어 사모펀드(PE)의 품에 안겼다. 김범준 이사는 이를 두고 “금융 시장에서 산업의 수익성과 가치가 완전히 증명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독립적인 중견 기업들이 거대 자본과 결합하며 산업의 체급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화려한 숫자 이면에 드리운 그림자도 놓치지 않았다. 에이피알과 클래시스 등이 수출의 포문을 열며 시장을 확장했지만 역설적으로 현재 가정용 미용 기기 시장은 과도한 경쟁상태에 직면했다는 것이 그의 냉정한 진단이다. 선두 주자의 성공을 벤치마킹한 수많은 후발 주자들이 우후죽순 진입하며 레드오션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난관을 뚫기 위해 김범준 이사가 제시한 해법은 ‘포트폴리오사 간의 시너지 확보’다. 그는 플랫폼 기업인 여신티켓과 의료기기 제조 기업을 서로 소개하여 단절되어 있던 시장의 정보와 기술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그의 주선으로 파트너십을 맺은 두 회사는 플랫폼의 시장 데이터를 제조사가 제품 기획에 활용하는 등 각자의 강점을 결합해 레드오션을 돌파할 동력을 얻게 됐다.
● AI의 실전···“환각 없는 AI, 리걸테크의 해자를 보라”
생성형 AI 열풍 속에서 김범준 이사가 주목한 실전 사용처는 ‘리걸테크’였다. 그는 AI가 모든 것을 다 잘할 필요는 없으며 ‘텍스트’와 ‘규정’이 명확해 정형 데이터가 풍부한 분야에서 생성형 AI의 발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그 중에서도 그는 법률 시장이 가진 데이터의 특수성에 주목했다. 법률과 판례는 정형화된 텍스트 데이터로 이뤄져 있어 AI 학습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국가별로 법체계가 상이하기 때문에 구글이나 오픈AI 같은 글로벌 빅테크가 쉽사리 넘볼 수 없는 진입 장벽도 존재한다.
김범준 이사가 초기 단계에 투자했던 로앤컴퍼니가 내놓은 생성형 AI 솔루션 ‘슈퍼로이어’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변호사들은 이미 슈퍼로이어가 작성한 초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업무 패턴을 바꾸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최근 기업들이 도입하고 있는 ‘팀 플랜’을 시장 확장의 핵심 동력으로 꼽았다. 사내 법무 팀에 소속된 변호사가 AI의 보조를 받아 계약서 검토와 리스크 관리를 수행하는 구조다. 김범준 이사는 “비용 및 시간 절감” 이라는 확실한 효용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리걸테크는 생성형 AI가 산업 생태계에 제대로 안착한 결정적 사례”라고 평가했다.
김범준 이사는 “AI 서비스 투자의 핵심은 버티컬 영역에서의 ‘데이터의 장악력’”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파운데이션 모델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특정 산업의 폐쇄적인 데이터를 얼마나 확보하고 이를 증강 검색 생성(RAG) 기술로 오류 없이 구현해느냐가 승부를 가른다”며 “리걸테크는 이 조건에 가장 완벽하게 부합하는 섹터”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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