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투데이=김나연 기자| 자본 시장의 언어는 차갑다. 모든 가치는 수익률(IRR)과 멀티플이라는 숫자로 치환된다. 하지만 대교인베스트먼트 김범준 이사는 이 냉정한 숫자 너머에 있는 ‘사람이라는 변수’를 본다. 그에게 투자는 책상 앞에서 보고서를 쓰는 ‘분석’의 영역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를 현장에서 창업자와 함께 뛰며 기업을 “내 자식처럼 기르는” 적극적인 동반자로 정의한다. 기술은 검증의 대상일 뿐 결국 그 기술을 비즈니스로 완성해내는 주체는 창업자라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다.
그의 ‘관계 중심’ 투자 철학은 최근 성사된 한 딜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김범준 이사는 이 딜이 성사되기까지 8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고 밝혔다. 오랜 기간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상호 검증의 시간을 거친 끝에 실제 투자 집행으로 이어진 경우다.
● "8년을 기다린 딜"… 관계가 만든 반전 드라마
김범준 이사가 해당 창업자 부부를 처음 만난 것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인플루언서 커머스 사업을 전개하던 그들은 열정적이었지만 당시 투자 기준에는 부합하지 않아 딜은 성사되지 못했다. 보통 심사역의 거절은 관계의 단절로 이어지기 마련이지만 김범준 이사의 선택은 달랐다. 사업 모델(BM)은 아쉬웠어도 창업자들의 진정성과 실행력이 매력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는 투자를 집행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1년에 한두 번씩 꾸준히 연락하며 식사를 하고 안부를 물었다. 그렇게 8년이 흘렀다. 그사이 창업팀은 세 번의 피보팅(사업 모델 전환)을 겪으며 아이템을 계속 바꿨고 실패의 쓴맛도 봤다. 하지만 김범준 이사는 "당장 투자는 하지 못해도 사람과의 연(緣)은 끊고 싶지 않았다"며 묵묵히 그들의 궤적을 지켜봤다.
반전은 2년 전에 찾아왔다. 그들이 절치부심 끝에 새롭게 런칭한 화장품 브랜드가 시장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것이다. 법인 전환 첫해에만 매출 60억원, 영업이익 10억원을 기록하며 시장을 놀라게 했다. 회사가 급성장하자 수많은 대형 VC들이 러브콜을 보냈다. 하지만 창업자는 가장 먼저 김범준 이사를 찾았다. 그들은 8년 전부터 이어온 신뢰를 선택했다. 현재 이 기업은 김범준 이사의 조력 하에 미국 시장에 진출하여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 매치메이커… "연결이 곧 혁신이다"
그의 '관계 중심' 철학은 투자 이후의 사후 관리 방식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김범준 이사는 단순히 이사회에 참석해 실적을 보고받는 감시자가 아니라 포트폴리오사들을 서로 연결해 새로운 기회를 만드는 '전략적 가교' 역할을 자처한다. 자신의 휴대폰에 저장된 8000여명의 네트워크가 그 자산이다.
이 네트워크가 빛을 발한 사례가 바로 여신티켓(패스트레인)의 CTO 영입 건이다 . 외주 개발로 시작해 자체 개발 조직이 부재했던 초기, 김범준 이사는 플랫폼 고도화를 위해 개발자 출신이자 창업 경험이 있는 자신의 오랜 친구를 떠올렸다. 그는 친구를 영입하기 위해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았고, 결국 그를 CTO로 합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해당 CTO를 중심으로 우수한 개발자들이 합류하며 기술 역량이 탄탄해졌고, 이는 성공적인 시리즈 B 투자 유치와 매출 성장의 기틀이 되었다. 자본 투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김범준 이사의 네트워크 자산이 돌파구가 된 것이다.
물론 모든 만남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드론 스타트업에게 체공 시간을 늘리기 위해 플렉서블(Flexible) 태양광 패널 기술을 보유한 기업을 소개해 주었으나 기술적 스펙과 역할분담 문제로 무산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김범준 이사는 네트워크를 통해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것이 VC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설령 비즈니스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이종 산업의 창업자들이 만나 새로운 영감을 주고받는 것 자체가 VC가 제공해야 할 핵심 밸류업(Value-up)"이라고 설명했다.
● 초기 투자의 딜레마… "금융 논리는 죄가 없다"
하지만 개별 기업을 돕는 '슈퍼 커넥터'로서의 노력과 달리 벤처투자 시장을 지배하는 거시적 환경은 훨씬 더 냉혹하다. 최근 업계의 화두인 '초기 투자 소외론'에 대해 김범준 이사는 감정적인 비판 대신 차가운 현실 인식을 앞세웠다. 그는 자본이 검증된 후기 기업이나 대형 펀드로 쏠리는 현상을 자본의 탐욕보다는 '금융의 합리성' 때문이라고 봤다.
출자자(LP) 입장에서 하방 리스크가 낮고 회수가 빠른 대형 펀드를 선호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장의 생리라는 것이다. 펀드 규모가 커질수록 소액의 초기 투자는 관리 효율상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초기 생태계가 붕괴된 것은 아니다. 김범준 이사는 한국 특유의 기술보증기금이나 신용보증기금 지원사업이 민간 자본의 공백을 메우는 강력한 안전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매출이 전무한 초기 기업도 기술력만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이 정책 금융 시스템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자산이라는 설명이다.
결국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정책의 호소'가 아닌 '수익률의 증명'이다. 민간 자본을 움직이는 유일한 언어는 '당위성'이 아닌 '숫자'이기 때문이다. 김범준 이사는 "정책 자금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VC 스스로 '초기 기업에 투자해도 돈을 벌 수 있다'는 확실한 트랙 레코드를 증명해야만 건강한 자본의 선순환이 완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 수익, 집중, 그리고 끝나지 않는 파트너십
인터뷰 말미 '어떤 벤처캐피탈리스트로 남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김범준 이사가 내놓은 답변은 명료했다. 그는 VC의 업(業)을 '수익률로 생태계의 선순환을 증명하는 일'로 정의했다.
그는 민간 자본이 주도하는 선순환 생태계를 완성하기 위해 결국 VC가 압도적인 수익률이라는 성적표를 내밀어야 한다고 믿는다. 미국처럼 민간 LP들이 자발적으로 줄을 서는 선순환 구조는 당위성이 아닌 확실한 보답(Return)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그의 방법론은 '선택과 집중'이다. 김범준 이사는 과거의 소액 분산 투자, 이른바 '뿌리기' 방식은 이전만큼 유효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는 대신 가능성 있는 소수의 기업에 자금과 리소스를 집중 투하하여 확실한 성장을 담보하는 전략을 택했다. 리스크를 회피하기보다 적극적인 개입으로 성공 확률을 높이겠다는 설명이다.
그의 시선은 엑시트 너머를 향한다. 김범준 이사는 투자의 끝을 회수가 아닌 '지속 가능한 동행'으로 설정했다. 펀드의 만기가 허락하는 한 상장 이후에도 창업자와 호흡하며 성장의 과실을 나누는 장기적 파트너가 되는 것이 그의 지향점이다.
승자독식이 없는 바이오 시장에서 누구에게나 열린 기회를 포착하고 8년의 기다림으로 증명한 신뢰 위에서 자본과 리소스를 집중해 수익을 증명해내는 것. 김범준 이사는 이 세 가지 축을 바탕으로 "창업자와 10년 이상을 동행하는 든든한 실행형 파트너"라는 자신만의 궤적을 그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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