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투데이=박재형 기자|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을 94일 앞두고 ‘조종사 서열 전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기장 승격부터 기종 전환, 임금과 보직까지 조종사의 경력 전반을 좌우하는 시니어리티(Seniority·연공서열)를 어떤 방식으로 통합할지를 두고 대한항공과 대한항공 조종사노동조합(KAPU)이 정면으로 충돌하면서다.
조종사에게 시니어리티는 단순한 입사 순서가 아니다. 누가 먼저 기장이 되는지를 비롯해 기종 전환과 노선 배정, 임금 등 향후 경력 전반을 좌우한다. 서로 다른 기준 아래 경력을 쌓아온 4000여명의 조종사를 하나의 기준으로 통합해야 하는 만큼 오는 12월 통합 대한항공 출범을 앞둔 핵심 인적통합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공정한 서열 보장하라”…본사 앞으로 나온 대한항공 조종사들
"조종사의 서열은, 조종사의 손으로!"
14일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 앞에서 대한항공 조종사노동조합 소속 조종사들이 모여 이 같은 구호를 외쳤다.
집회에서는 시니어리티와 임금, 비행수당 등을 둘러싼 구호가 이어졌다. 대한항공 조종사노조가 단체 집회에 나선 것은 약 10년 만으로 알려졌다. 노조는 지난 7일 2024년 단체협약과 2025년 임금협약 교섭 결렬을 이유로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노동쟁의 조정을 신청한 상태다.
문형철 대한항공 조종사노조 위원장은 이날 연단에서 “시니어리티는 단순 서열표가 절대 아니다”라며 “단체협약 제24조에는 ‘노사 합의로 정한 서열순위 제도를 준수한다’고 정확하게 나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미 정해진 원칙을 공정하게 지키라는 것”이라며 회사가 통합 서열을 일방적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기존 입장을 재차 강조했다.
노조가 시니어리티를 비행 안전 문제와 연결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노조 관계자는 “시니어리티는 조종사의 승격과 기종 배정, 임금 등 직업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원칙”이라며 “그 원칙이 흔들리고 구성원들이 결과를 신뢰하지 못한다면 통합 이후에도 불안과 갈등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날 집회에서 쟁점은 시니어리티에 그치지 않는다.
노조는 10시간 이상 장거리 비행 뒤 모든 노선에서 30시간 이상의 휴식 시간을 보장할 것도 요구하고 있다. 이날 집회에서도 “휴식은 복지가 아니라 안전”이라며 장거리 비행 후 충분한 휴식이 조종사의 판단 능력과 직결된다는 주장이 나왔다.
임금 3.3% 인상과 비행수당 산정 방식도 요구안에 포함됐다. 노조는 항공기 출발 지연 등으로 실제 근무시간이 길어져도 이에 대한 비행수당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문 위원장은 이날 “정당한 노동에는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항공·아시아나 조종사 서열 문제...왜 터졌나
이번 시니어리티 갈등의 본질은 서로 다른 기준 아래 경력을 쌓아온 두 회사 조종사를 어떤 원칙으로 배치할 것인지에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현재 대한항공 조종사는 약 3000명, 아시아나항공은 약 1000명으로 통합 대상만 4000명을 웃돈다. 대한항공이 통합되면 조종사 규모만 4000명 이상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는 양사가 조종사를 뽑고 경력을 인정해온 방식이 달랐다는 점이다. 민간 경력 부기장 채용 과정에서 대한항공은 비행경력 1000시간을 요구한 반면 아시아나항공은 300시간 수준을 적용했다. 군 출신과 민간 출신 조종사의 내부 서열을 정하는 방식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노조는 회사가 내놓은 결과가 대한항공 조종사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에 앞서 ‘서열을 정하는 절차와 원칙’ 자체를 노사가 합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노조는 단체협약 제24조에 “회사는 노사 합의로 정한 운항승무원 서열순위 제도를 준수한다”고 명시돼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통합으로 기존에 없던 새로운 서열이 만들어지는 만큼 회사가 이를 고유 인사권이라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확정할 수 없다는 것.
이에 대한항공은 외부 컨설팅 등을 통해 양사의 기존 내부 서열을 최대한 유지하는 승진안을 마련했다고 알려졌다. 또 기존 대한항공 조종사의 기장 승격 요건이나 내부 상대 서열에도 불이익이 없다는 입장이며, 승진 여부는 사용자의 고유 인사권이라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대한항공 측은 스마트투데이에 노조 측에서 주장한 단체협약 제24조에 대해 지난 2003년 노조 내부 총회 과정에서 부결되었고, 회사측과 새로운 합의에 이르지 못해 사문화된 조항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노조가 지난 2004년 임단협에서도 해당 조항 위반을 이유로 가처분 신청을 냈으나, 법원에서 '기장 승격 등에 대한 인사권은 사용자 측에 있음'을 명확히 하여 기각한 바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휴식시간이나 수당에 관해서 대한항공 관계자는 "서열을 제외한 임단협 사항들은 모두 잠정합의에 이를 수준으로 노사간 의견 합치가 이루어 졌으며, 이는 조합 집행부가 내부 공지, 외부 보도 자료 등을 통해 이미 여러차례 밝힌 바 있다"며 "다만, 기장 승진 순위 관련 사항은 쟁의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려하여 이제와서 마치 임금 등의 사항에 대해서도 노사 간 이견이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항공업계에서는 이번 갈등의 밑바탕에 시니어리티에 따라 결정되는 실질적인 이해관계가 있다고 본다. 기장 승격뿐 아니라 선호 기종이나 노선, 휴무 등 근무 여건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만큼 기존에 쌓아온 서열을 어디까지 인정받느냐가 조종사 개개인에게는 민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항공업계 전문가는 “가령 추석 때 먼저 쉬고 싶다 하면 시니어리티가 높으면 먼저 쉴 수 있다. 또 우선적으로 가고 싶은 노선, 기종 선택권 등 시니어리티에 따른 혜택이 많다”라며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한편으로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승진 문제 넘어 기단·노선 재편에도 연결...대한항공 입장은?
시니어리티 문제가 민감한 또 다른 이유는 통합 대한항공의 실제 운항체계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은 통합 이후 현재 165대 수준인 항공기 규모를 약 230대로 확대하게 된다. 조종사도 3000명 수준에서 4000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양사가 비슷한 시간대에 운항하는 중복편을 조정하고 항공기와 슬롯을 재배치하는 한편 기종별 운항체계와 훈련 기준도 하나로 맞춰야 한다.
항공기는 기종별로 필요한 자격이 다르다. 장거리 운항에는 비행시간에 따라 추가 조종인력이 필요하다. 노선이나 기단 운용계획이 바뀌면 필요한 기장 수와 부기장 승격 인원, 기종별 전환훈련 규모 역시 함께 달라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업계에서는 통합 시니어리티가 장기간 확정되지 않으면 단순한 개인 승진 문제를 넘어 향후 기장 인력과 기종별 조종사 배치 계획을 세우는 데에도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해외 항공사 합병에서도 시니어리티는 별도로 다뤄질 만큼 민감한 사안이다. 2008년 델타항공과 노스웨스트항공 합병 당시 양사 조종사 조직은 합병 완료에 앞서 공동 근로계약과 별도로 하나의 조종사 시니어리티 명부를 만드는 절차를 마련했다. 최종 통합 과정에서도 조종사 대표와 회사가 시니어리티 통합을 별도의 핵심 과제로 다뤘다 각국의 노사관계 제도가 달라 대한항공 사례와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항공사 M&A에서 조종사 서열 문제가 단순한 내부 인사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파업해도 국제선 80%…또 다른 전선은 ‘필수유지업무’
노사 갈등이 장기화 할 경우, 또 하나의 변수는 ‘필수유지업무’다.
항공운수사업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상 필수공익사업에 해당한다. 이에 따라 파업에 돌입하더라도 국민의 생명·안전과 일상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업무는 일정 수준 이상 유지해야 한다. 노사가 유지 수준에 합의하지 못하면 노동위원회가 사업장 특성을 고려해 유지 수준과 대상 직무, 필요 인원 등을 결정한다.
현재 대한항공에 적용되는 기준은 국제선 80%, 제주노선 70%, 내륙노선 50%로 알려졌다. 2010년 서울지노위가 대한항공 조종사의 필수유지업무 수준을 결정하면서 마련된 기준이다.
노조는 노동쟁의 조정과 별도로 필수유지업무 유지 수준에 대한 결정도 서울지노위에 신청했다.
노조의 논리는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때 국내 항공시장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저비용항공사(LCC)를 비롯해 국내 취항 항공사와 공급이 확대돼 다른 항공편을 통한 대체수송 여력이 커진 만큼 기존 유지율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적절한지 다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높은 유지율이 그대로 적용되면 파업에 나서더라도 대부분의 국제선을 운항해야 해 쟁의행위 효과가 제한된다는 점도 노조가 재조정을 요구하는 배경이다.
인적통합 성패, 결국 ‘수용 가능한 기준’에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 작업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지만 이번 시니어리티 갈등은 그 인적통합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시험대가 되고 있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항공기 도색과 시스템, 터미널, 운항 절차 등 물리적인 통합과 달리 직원들의 경력과 임금, 승진 순서를 합치는 인적 통합은 구성원들의 이해관계가 직접 맞물린다. 특히 시니어리티는 한 번 결정되면 향후 조종사들의 승격과 보직 등에 장기간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양측이 받아들일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관건이다.
문 위원장이 이날 집회에서 “오늘 침묵하면 내일의 기준이 되고, 오늘 함께하면 내일의 기준을 바꿀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 것도 통합 이전에 서열 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전문가들은 이해관계가 첨예한 만큼 어느 한쪽을 완전히 만족시키는 해법을 찾기는 쉽지 않다고 본다. 한 항공업계 전문가는 양측이 일정 부분 서로의 이해관계를 인정하고 수용 가능한 선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봤다. 그는 “서로 배려하고 양식 있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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