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수백억 ‘해외 거장’ 모시기…조합원 등골 빼먹는 K-설계의 역설

오피니언 | 김종현  기자 |입력

|스마트투데이=김종현 기자| 최근 강남권은 물론 주요 재건축 수주전에서 씁쓸한 관전 포인트가 하나 생겼다. 바로 대형 건설사들의 ‘해외 스타 건축가 모시기’ 경쟁이다. 과거에는 시공사의 아파트 브랜드 파워가 수주전의 당락을 갈랐다면, 이제는 어느 해외 유명 건축가의 간판을 달고 오느냐가 하이엔드 수주전의 ‘필수 스펙’으로 자리 잡았다.

단순히 몇몇 단지의 이야기가 아니다. 삼성물산이 대치쌍용1차 수주전에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를 설계한 ‘다니엘 리베스킨트’와 손잡은 것을 시작으로, 반포와 목동 등 핵심 정비사업장 곳곳에서 해외 거장들의 이름이 도배되고 있다. 최근 신반포19·25차 재건축 수주전에서는 삼성물산이 미국 ‘SMDP’와, 포스코이앤씨가 네덜란드 ‘유엔스튜디오(UNStudio)’와 손잡으며 맞불을 놨다. 목동 재건축 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본격적인 시공사 선정 절차를 앞둔 목동6단지는 물론이고, 최근 설계업체 선정에 나섰던 목동3단지 등에서도 ‘아르카디스’, ‘유엔스튜디오’ 등 글로벌 업체와의 협업이 전면에 등장했다.

문제는 이 화려한 간판 이면에 숨겨진 ‘막대한 청구서’다. 해외 유명 건축가의 이름을 빌려오는 데는 적게는 수십억 원에서 많게는 수백억 원에 달하는 비용이 소요된다. 건설사가 이 비용을 자비로 감당할 리 만무하다. 결국 이는 고스란히 총공사비 증액으로 이어지고, 조합원들이 떠안아야 할 ‘추가 분담금 폭탄’으로 직결된다. 겉으로는 명품 주거 단지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조합원들의 지갑을 털어 단순히 ‘이름값’을 위해 막대한 국내 자본을 해외로 유출시키는 씁쓸한 국부 유출 현장인 셈이다.

우리나라 설계사들의 실력이 부족해서 비싼 돈을 주고 해외 건축가를 초빙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K-설계의 현주소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실제로 영국의 저명한 건축 매거진 ‘빌딩디자인(BD)’이 전 세계 건축설계회사를 평가해 발표한 ‘WA100(World Architecture 100)’ 2024년 랭킹에 따르면, 국내 설계사인 희림건축과 해안건축이 당당히 글로벌 6위와 8위에 각각 랭크됐다. 전 세계 주요 랜드마크를 직접 빚어내는 실질적인 기술력과 노하우는 이미 우리 기업들이 충분히 쥐고 있는 것이다.

실력은 세계 최상위권인데, 왜 안방에서는 수백억 원을 들여 해외 건축가의 명함을 빌려와야 하는 촌극이 벌어질까. 그 해답은 철저히 ‘기업 간 거래(B2B)’에 치중해 온 국내 설계업계의 구조적 한계와 대중적 브랜딩의 부재에 있다.

국내 대형 설계사들은 그동안 기업 사옥, 대형 공공건축물 등 굵직한 B2B 영업에만 몰두해 왔다. 발주처의 까다로운 요구를 맞추는 데는 도가 텄지만, 정작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건축 철학을 일반 대중에게 어필하고 인지도를 쌓는 구체적인 ‘기업과 소비자간 거래(B2C) 브랜딩’ 노력에는 철저히 무심했다. 정비사업의 최종 결정권자는 기업이 아닌 일반인인 ‘조합원’이다.

실제로 희림은 대한민국의 관문인 인천국제공항 제1·2여객터미널을 비롯해 최근 화제를 모은 핫플레이스 '디올 성수', 정부세종청사 등 대중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랜드마크들을 설계했지만, 일반인들에게 이 세계 6위 설계사는 그저 낯선 회사 이름일 뿐이다. 대중과 소통하지 않은 탓에 건설사들은 조합원의 표심을 현혹하기 쉬운 해외 간판에 피 같은 자본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K-건축의 실력은 이미 수치로 증명됐다. 이제는 막대한 조합원 분담금 증가와 자본 유출을 초래하는 소모적인 ‘보여주기식 마케팅’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내 설계사들은 B2B라는 안락한 온실에서 나와 대중과 호흡하며 자신들만의 B2C 브랜드 가치를 키워야 하고, 건설사 역시 겉치레 꼬리표가 아닌 실질적인 주거의 질과 합리적인 공사비로 승부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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