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투데이=김나연 기자|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국면에서 총 74억달러 규모의 대규모 해외 투자 사업 '프로젝트 크루시블'이 의결권 자문사들의 검증대에 올랐다. 고려아연은 미국 정부 등이 주도하는 합작법인 '크루시블 JV'에 신주를 발행해 약 19억4000만달러를 조달했다. 나머지 자금은 자체 출자와 미 정부의 대출·보조금으로 채운다. 지분 경쟁의 한가운데서 단행된 대규모 자본 배치인 만큼, 사업의 명분과 의사결정 절차가 동시에 다뤄졌다.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인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와 글래스루이스(Glass Lewis)는 이 대규모 투자 및 신주 발행 건을 두고 심층 분석을 내놓았다. 두 기관 모두 핵심 광물 공급망 확보라는 프로젝트의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타당성에는 공감표를 던졌다. 그러나 자금 조달을 위한 신주 발행 절차와 이사회 승인 과정을 두고는 '지배구조의 흠결'과 '합법적 경영 판단'으로 확연한 시각차를 드러냈다.
ISS "전략적 가치 인정하나 이사회 감독 기능은 부재"
ISS는 크루시블 프로젝트가 고려아연의 장기 전략인 '트로이카 드라이브'의 일환으로, 글로벌 경쟁력 강화 차원의 투자라는 사측의 청사진이라는 점을 보고서에 명시했다. 영풍과 MBK파트너스 측 역시 이 프로젝트의 전략적 논리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함께 짚었다.
그럼에도 ISS는 투자를 결정한 이사회의 승인 절차에 흠결이 있다고 지적했다. ISS는 이번 안건은 단순한 투자가 아니라 회사의 자기자본 대비 약 110%에 달하는 19억4000만달러 규모의 자본 배치라는 건에 주목했다. 뿐만 아니라 투자 시계열이 30~40년에 달하는 장기 투자를 결정하는 건임에도 처리 속도가 지나치게 촉박했다고 분석했다. 특히 방대한 재무 자료를 검토할 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이사회 개최 불과 하루 전에 배포한 점을 절차적 흠결의 핵심으로 지목했다.
ISS는 이 과정에서 발생한 기존 주주들의 지분 희석 문제도 비판했다. 이번 제3자 배정 신주 발행으로 영풍·MBK 컨소시엄의 의결권 지분은 약 46%에서 41%로 하락했다. ISS는 현 이사회가 이러한 대규모 자본 배치와 지분 희석을 사전에 적절히 감독할 통제 장치를 갖추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결과적으로 ISS는 크루시블 프로젝트의 승인 과정을 지배구조 개편이 필요한 근거로 활용했다. 대규모 투자가 졸속으로 처리되는 구조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집행임원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영풍·MBK 측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또한 제3자 배정 유상증자 시 이사의 충실의무를 명시하고, 이사회 소집 통지 기간을 3일로 늘리는 정관 변경안에도 모두 찬성을 권고했다.
글래스루이스 "자금 구조 이례적이나 시장과 법원은 지지"
글래스루이스 역시 크루시블 프로젝트의 자금 조달 구조가 다소 이례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미국 정부가 프로젝트 회사에 직접 자본을 투입하는 대신, 고려아연의 자금이 일부 섞인 중간 합작법인을 통해 다시 고려아연 신주를 매입하는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주주총회 기준일 직전에 대규모 신주가 발행된 점에 대한 반대 측의 불만도 보고서에 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래스루이스는 이 프로젝트에 대한 자본 시장의 반응에 주목했다. 2025년 12월 프로젝트 발표 직후 고려아연의 주가가 장중 최대 26%까지 급등했던 사실을 분석의 주요 근거로 삼았다. 비록 경영권 분쟁 격화로 이후 주가가 변동성을 보였으나, 초기 급등은 일반 투자자들이 프로젝트의 전략적 타당성을 지지한 결과라고 해석했다.
신주 발행을 둘러싼 사법부의 판단도 글래스루이스의 권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앞서 영풍·MBK 컨소시엄은 크루시블 JV를 대상으로 한 신주 발행을 막아달라며 법원에 가처분을 신청한 바 있다. 글래스루이스는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이를 기각하며 사측의 손을 들어준 사실을 보고서에 인용했다.
법원은 해당 신주 발행을 단순한 경영권 방어용으로 보지 않았다. 글래스루이스는 법원이 이례적인 자금 순환 방식조차 상법 및 정관이 허용하는 합법적인 사업 목적 내에 있다고 판결한 점을 존중했다. 이 같은 사법부의 판단과 긍정적인 시장 지표를 종합할 때, 신주 발행 절차 논란만으로 이사회의 전면 교체를 정당화하기는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크루시블 지명 이사 '만장일치' 찬성…표심 향방은
두 의결권 자문사는 절차적 정당성을 두고 대립했으나, 이사 선임 안건에서는 교집합을 이뤘다. 양사 모두 크루시블 JV 측이 지명한 이사 후보인 '월터 필드 맥랠런'의 선임에 찬성을 권고했다. 합작 파트너의 이사회 참여가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수행에 필수적이라는 판단에서다.
맥랠런 후보는 미국 공기업의 이사회 경험을 갖춘 비상무이사 후보다. ISS와 글래스루이스는 그가 이사회에 합류함으로써 고려아연의 북미 진출과 핵심 광물 공급망 확보 전략에 실질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봤다.
지분 희석으로 타격을 입어 신주 발행에 반발했던 영풍·MBK 컨소시엄도 맥랠런 후보의 선임에는 찬성표를 던지기로 했다. 이는 크루시블 프로젝트가 가진 비즈니스적 가치와 한미 양국 간의 공급망 협력이라는 대의를 부인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결과적으로 크루시블 프로젝트는 이번 정기 주주총회에서 상반된 프레임으로 다뤄지게 되었다. ISS의 지적처럼 경영진에 대한 견제 장치 마련과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동시에 글래스루이스의 분석처럼 회사의 장기적인 성장 비전과 사측의 경영 능력을 입증하는 방패로도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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