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투데이=강동현 기자| 국내 메모리 반도체의 투자 논리가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PC와 스마트폰 판매 대수, 기기당 탑재 용량이 수요를 결정했지만 AI 시대에는 모델이 처리하는 토큰의 양과 컨텍스트 윈도우 확대가 HBM·D램 수요를 좌우한다. 미래에셋자산운용 정의현 본부장은 “국내 메모리 반도체 산업이 사이클 산업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성장 산업으로 바뀌었다”고 진단했다. 정 본부장은 에이전트형 AI 확산으로 토큰 사용량이 늘어나면서 메모리 수요를 단기 업황 반등이 아니라 구조적 성장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짚었다.
수요 기준이 ‘기기 판매량’에서 ‘토큰 사용량’으로 이동했다
정 본부장은 과거 메모리 산업을 전형적인 사이클 산업으로 설명했다. 스마트폰 한 대에 들어가는 램 용량과 출하 대수를 곱하면 시장 규모를 추정할 수 있었고, 공급이 이를 따라잡으면 가격이 하락하는 구조였다. 이 때문에 메모리 업체의 밸류에이션은 오랫동안 PBR 중심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AI 확산은 이 산식을 흔들고 있다. 정 본부장은 “AI라는 게 결국에는 토큰을 소비하게 되는데, 이 토큰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HBM이나 D램이 끊임없이 돌아가야 된다”고 말했다. AI 모델이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텍스트 규모인 컨텍스트 윈도우가 커질수록 메모리 사용량도 함께 늘어난다는 판단이다.
특히 에이전틱 AI는 기존 챗봇보다 메모리 수요를 더 크게 자극한다. 단순 질의응답은 한 번의 요청과 답변으로 끝나지만, 에이전트는 계획, 실행, 수정, 재계획을 반복한다. 정 본부장은 “한 가지의 질문이나 요청을 작업하기 위해서 수십 번, 수백 번에 나누어 토큰을 소비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는 메모리 수요가 단말기 판매 사이클보다 AI 서비스 사용량과 더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HBM은 AI 칩 성능 경쟁의 핵심 변수로 올라섰다
정 본부장은 AI 가속기 확산이 메모리 수요를 단순 동반 성장시키는 수준을 넘어, 칩 설계 자체에서 HBM의 비중을 높이고 있다고 봤다. 그는 구글의 8세대 TPU 추론용 모델에서 HBM 탑재량이 칩당 288GB까지 늘었고, 엔비디아의 차세대 베라 루빈 계열에서도 메모리 장착량이 크게 확대되는 흐름을 언급했다. AI 반도체의 성능 경쟁이 연산 속도만이 아니라 메모리 대역폭과 용량 경쟁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해석이다.
정 본부장은 “GPU 같은 칩에 대한 수요도 늘어나고 있는데, 칩에 탑재되는 HBM 메모리 용량도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AI 가속기 출하량과 칩당 HBM 탑재량이 동시에 늘면 메모리 업체의 매출 증가 폭도 커질 수 있다. 이 경우 HBM 공급 능력과 수율, 패키징 경쟁력이 기업가치를 가르는 핵심 변수가 된다.
랠리의 지속 조건은 CAPEX 규모보다 빅테크 현금흐름이다

AI 반도체 랠리의 핵심 변수는 빅테크의 CAPEX다. 정 본부장은 딥스크 R1이 저비용 AI 모델 가능성을 보여주며 시장에 CAPEX 축소 우려를 만들었지만, 이후 공개된 V4 모델은 “지난 R1 모델만큼의 충격은 없었다”고 평가했다. 오히려 모델 경쟁이 이어질수록 LLM 기업들의 인프라 투자가 더 가속화될 수 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CAPEX의 절대 규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 본부장은 “하이퍼스케일러들이라든가 LLM 모델을 가진 빅테크 기업들의 CAPEX 가이던스를 계속 잘 살펴봐야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알파벳,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등 하이퍼스케일러들의 CAPEX 가이던스가 계속 상향되는지, 또는 둔화 조짐을 보이는지가 반도체 수요 기대의 선행 지표라는 설명이다.
더 중요한 지표는 영업현금흐름이다. 정 본부장은 과거 클라우드 초기 확장기에는 영업현금흐름 대비 CAPEX 비중이 30% 미만이었지만, 현재는 50% 수준까지 올라온 사례를 언급했다. 빅테크의 현금흐름이 탄탄한 동안에는 AI 인프라 투자 확대가 가능하지만, 현금흐름이 흔들리면 CAPEX 조정 가능성도 커진다. 정 본부장은 빅테크의 현금흐름이 흔들리거나 AI 관련 매출 증가세가 둔화될 경우 향후 인프라 투자도 조정될 수 있다고 봤다.
메모리 랠리의 후행 변수는 소부장 실적이다
정 본부장은 메모리 대형주의 강세가 소재·부품·장비 기업으로 확산될 가능성에도 주목했다. 그는 “메모리 대장주의 강세 후에 6개월에서 1년 정도 시차를 두고 소부장 기업들이 실적이 강하게 반등하는 패턴”이 있었다고 말했다. HBM과 첨단 D램의 공정 난이도가 높아질수록 장비, 소재, 부품의 단가와 중요도도 함께 올라간다는 설명이다.
다만 메모리 대형주의 주가 상승이 곧바로 소부장 전반의 실적 개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 본부장의 관점은 AI 인프라 투자 확대가 HBM에서 끝나지 않고 공정 장비와 부품, 전력기기, 원전 등 병목이 발생하는 후방 밸류체인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결국 반도체 랠리의 지속 여부는 빅테크의 CAPEX 가이던스, 영업현금흐름, AI 관련 매출 증가율에 달려 있다. 국내 반도체 밸류체인의 재평가는 HBM 기대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토큰 사용량 증가가 실제 인프라 투자와 메모리 기업의 실적으로 연결되는지가 이번 랠리의 지속성을 가를 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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