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투데이=심두보 기자| 한때 대형마트는 대한민국 유통 생태계의 최정점에 군림하던 절대적인 포식자였다. 홈플러스를 비롯한 대형 유통업체들이 압도적인 자본력과 물류망을 앞세워 지역 상권을 장악해 나가자, 골목상권을 침해한다는 비판이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당시 대형마트는 납품업체와 지역 소상공인들을 상대로 우월적 지위를 행사하는 '갑(甲)'의 위치에 있었다. 유통 권력을 독점한 이들의 확장을 제어하는 것은 국가적 과제로 여겨졌다.
정부는 이러한 독과점을 막고 전통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의무휴업일 지정, 신규 출점 제한 등 강력한 대형마트 규제를 도입했다. 이 규제는 오프라인 유통의 패권이 영원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설계된 견제 장치였다. 그러나 시대의 축은 대형마트가 규제와 씨름하는 사이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커머스의 진화는 대형마트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를 뒤흔들었다. 쿠팡과 같은 국내 플랫폼은 당일 배송과 새벽 배송으로 신선식품 시장까지 장악했고,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 등 글로벌 기업들은 초저가 공세로 공산품 수요를 흡수했다. 거대한 매장과 방대한 주차장을 유지하며 고객을 기다리던 홈플러스의 전통적 비즈니스 모델은 고비용·저효율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갑의 위치에서 군림하던 대형마트는 이제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이러한 거대한 거시적 흐름과 기술적 진보 속에서 홈플러스는 위기에 봉착했다. 돌이킬 수 없는 산업 지형의 변화 속에서 일각에서는 대주주인 MBK파트너스와 최대 채권자인 메리츠금융그룹을 향한 책임론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이들이 자금을 지원하지 않아 10만명의 고용이 위협받고 홈플러스가 파국을 맞았다는 비판이 쏟아진다. 정치권 역시 이들의 도덕적 해이를 지적하며 고통 분담을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산업의 구조적 몰락이라는 거대한 해일 앞에서 두 금융 주체에게 침몰의 책임을 묻는 것은 진단 오류다. 홈플러스의 몰락은 탐욕스러운 사모펀드가 만들어낸 한국형 비극이 아니다. 이는 아마존과 쿠팡이 주도하는 디지털 패러다임 변화 속에서 전 세계 전통 리테일 기업들이 겪은 필연적인 구조조정의 일환이다. 미국 100년 역사의 백화점 시어스, 세계 최대 장난감 유통업체 토이저러스, 홈퍼니싱 강자 베드배스앤드비욘드 모두 이커머스의 전환기를 넘지 못하고 청산·파산했다.
자선사업가가 아닌 그들에게 무한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MBK파트너스와 메리츠금융그룹을 도덕적 심판대에 올리기 전에 자본시장의 기본 전제를 상기해야 한다. 이들은 구호 단체나 공공기관이 아닌, 철저히 계약에 기초하여 움직이는 경제 플레이어에 불과하다. 메리츠금융은 1조3000억원 규모의 대출을 실행한 1순위 담보권자이자, 자사 투자자들의 자본을 보호해야 할 수탁자 책임을 지닌 금융기관이다. 회수 가능성이 불투명한 부실 기업에 명확한 추가 담보 없이 자금을 쏟아붓는 것은 이들의 계약 범위를 벗어난 명백한 배임 행위다.
MBK파트너스 역시 사모펀드(PEF) 운용사로서 투자자들과 맺은 유한책임의 룰 안에서 움직이는 주체다. 이들은 펀드 출자금 이상의 손실을 강요받을 법적 의무가 없음에도, 이미 김병주 회장의 자산 등을 담보로 자금을 조달해 집행하는 등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 계약의 틀을 넘어선 초법적인 현금 헌납을 강요하는 것은 자본시장의 근간인 사적 자치의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다.
계약에 기반한 플레이어들은 투자 가치가 있다면 누가 등 떠밀지 않아도 자본을 투입한다. 반대로 이들이 지갑을 닫았다는 것은 기업의 존속 가치가 청산 가치를 현저히 하회한다는 시장의 냉혹한 평가가 내려졌음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두 주체의 이기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시장의 자정 및 평가 기능을 부정하는 논리다.
멈춰선 거대한 배, 연료보다 필요한 건 새로운 지도
자본시장은 언제나 냉정하고 수치에 입각한 합리주의를 따른다. 시대적 흐름을 타지 못한 비즈니스 모델은 시장에서 퇴출당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순리다. 홈플러스 사태는 개별 금융사나 사모펀드의 탐욕이 만들어낸 비극이 아니라, 이커머스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필연적 결과다.
홈플러스가 회생절차 과정에서 미국 식료품점 '트레이더 조(Trader Joe's)' 모델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채택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과거 5만 개 이상의 방대한 품목(SKU)과 대규모 점포를 앞세웠던 '다품종 대량 판매' 방식의 전통적 유통 모델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선언이다.
물론 현재 법정관리에 직면한 홈플러스가 우량 제조사들을 상대로 트레이더 조 수준의 브랜드 협상력과 상품 기획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본시장이 유통업의 생존 조건으로 요구하는 '오프라인 자산 효율성의 극대화'를 유일한 대안으로 지목했다는 사실이다.
자본시장과 사법부가 주목하는 지점 역시 감성적인 고통 분담이 아닌, 사업 구조 개편의 실현 가능성이다. 냉정한 경제 주체들에게 법 테두리 밖의 책임을 강요하는 정치적 소비를 멈출 때, 비로소 시장의 순리에 따른 구조조정과 대안적 생존의 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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