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투데이=김한솔 기자| 한국 경제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성과가 극명하게 갈리는 ‘K자형 성장’의 구조적 한계에 직면한 가운데, 향후 5년간 150조 원이 투입되는 ‘국민성장펀드’가 산업 생태계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지 시장의 관심이 쏠린다.
11일 한국금융연구원과 산업연구원, 하나금융연구소가 공동 개최한 ‘전략적 산업정책 시대의 금융정책’ 세미나에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다는 진단이 이어졌다.
김남훈 하나금융연구소 경제산업분석팀장은 “국내 대기업 중심의 실적 개선과 달리 중소기업의 매출과 수익성 회복은 제한적”이라며 기업 간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인공지능(AI) 도입률에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는 뚜렷하다. 대기업의 AI 활용이 빠르게 확산되는 반면, 중소기업은 비용 부담과 전문 인력 부족, 데이터 인프라 한계 등으로 도입 속도가 더딘 상황이다. 기술 자산 축적에서도 차이가 벌어지면서 기업 규모에 따른 성장 경로의 분화가 심화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구정한 한국금융연구원 센터장 역시 우리 경제가 일부 우량 기업만 지속 성장하는 ‘K자 성장’ 구조에 머물러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산업 구조조정과 선별적 집중 지원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정책금융이 성장 잠재력이 높은 분야에 전략적으로 투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수적 금융 관행…국민성장펀드도 대기업·검증 기업에 쏠리나
문제는 자금 공급의 불균형이다. 혁신 중소기업에 모험자본이 흘러가야 하지만, 민간 금융은 여전히 회수 가능성이 높은 대기업이나 이미 검증된 기업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첨단 전략산업 육성과 모험자본 공급을 목표로 출범한 150조 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 역시 실제 운용 과정에서 기존의 보수적 투자 관행을 답습할 수 있다는 우려가 업계에서 나오는 배경이다.
벤처투자 업계에서는 국민성장펀드가 회수 안정성이 높은 대기업이나 후기 성장기업에 집중될 경우, 혁신 중소·벤처기업의 자금 공백을 메우기보다 기존 투자 구조를 강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대규모 정책자금 유입으로 유망 기업의 밸류에이션이 빠르게 높아지면, 상대적으로 자금 여력이 부족한 중소형 벤처캐피탈의 후속 투자 참여가 위축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경우 투자 기회가 일부 대형 자본에 쏠리면서 벤처 생태계의 다양성이 약화될 수 있다. 실제로 자본시장에서는 유망 AI 팹리스 기업이나 주요 대기업의 메가 프로젝트에 대형 기관 자금이 집중되는 흐름이 관찰된다.
결국 국민성장펀드가 벤처 생태계의 자금 공백을 메우려면 단순히 대규모 자금을 공급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자금이 어느 성장 단계의 기업에, 어떤 방식으로 배분되는지가 정책 효과를 좌우할 수밖에 없다.
당국 “최소 50조 원 중소·벤처에 할당…간접투자로 촘촘히 공급”
이 같은 쏠림 우려에 대해 국민성장펀드 실무자는 정책적 안전장치가 마련돼 있다고 설명했다.
강성호 금융위원회 국민성장펀드 총괄과장은 “대기업은 한 번에 지원되는 금액 단위가 워낙 커 자금이 대기업에만 집중되는 것처럼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전체 150조 원 가운데 최소 50조 원은 중소·중견기업에 충분한 자금이 공급될 수 있도록 할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투자 쏠림과 밸류에이션 급등 가능성에 대해서도 설명을 내놨다. 강 과장은 “투자를 통해 기업가치가 오르는 측면도 있지만, AI 등 글로벌 산업 흐름에 비춰볼 때 현재 가치가 저평가인지 고평가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일부 기업의 밸류에이션이 오르더라도 아직 가치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기업들도 투자를 받을 수 있도록 벤처캐피탈과 사모펀드를 통한 간접투자 방식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며 “자금이 보다 다변화된 경로로 흘러갈 수 있도록 구조화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국민성장펀드가 직접 대형 딜에만 참여하는 방식이 아니라, 민간 운용사와 투자기관을 통해 중소·벤처기업까지 자금이 흘러가도록 설계됐다는 의미다. 다만 실제 집행 과정에서 이 같은 구조가 얼마나 촘촘하게 작동할지는 향후 운용 성과를 통해 검증될 것으로 보인다.
플랫폼에서 딥테크로…“산업 변화에 맞춘 금융 방식 필요”
강 과장은 첨단 산업 생태계 전환에 맞춰 금융 지원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산업은 과거 10년과 달리 앞으로의 10년 동안 큰 전환기를 맞게 될 것”이라며 “과거 벤처 생태계가 이커머스나 플랫폼 기업 중심이었다면, 앞으로는 반도체와 AI, 바이오처럼 대규모 장기 시설투자가 필요한 산업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산업의 무게중심이 플랫폼에서 딥테크로 이동하면서 자금 수요의 성격도 달라지고 있다. 이커머스나 플랫폼 기업은 상대적으로 빠른 시장 확장과 매출 성장이 가능했지만, 반도체와 AI,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은 연구개발과 설비 투자, 임상 또는 양산 체계 구축에 장기간 자본이 투입돼야 한다.
이에 따라 정책금융도 기존의 대출 만기 연장이나 단기 유동성 지원 방식에 머물러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산업별 자금 수요와 성장 단계를 면밀히 분석해, 기업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신규 시설자금과 모험자본을 적시에 공급하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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