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투데이=심두보 기자| 고려아연이 미국 테네시주에 추진 중인 '프로젝트 크루셔블(Project Crucible)'이 경영권 분쟁의 판도를 뒤흔들 '숨은 뇌관'으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 국방부(DoD)가 참여하는 합작법인(JV) 구조와 수십억 달러 규모로 추산되는 자금 조달이 진행 중인 가운데, 해당 대출 계약서에 담긴 세부 조항(Covenant)이 MBK파트너스·영풍 연합의 경영권 확보 시도에 결정적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번 미국 프로젝트가 단순한 해외 투자를 넘어, 최윤범 회장 측이 마련한 가장 강력한 '독소 조항(Poison Pill)'이 될 가능성이 있다.
● ‘지배구조 변동’ 조항의 존재 여부
고려아연은 미국 테네시 제련소 건설을 위해 미국 국방부 및 현지 금융기관으로부터 약 47억 달러 규모의 자금을 조달하게 된다. 주목해야 할 대목은 통상적인 미 정부의 정책 자금, 특히 국방물자생산법(DPA) Title III에 기반한 지원에는 엄격한 '대주주 적격성' 심사가 수반된다는 점이다.
미국 국방부나 에너지부가 지원하는 전략 자산 프로젝트의 경우, 대출 약정서에 '경영권 변동 시 조기 상환(CoC, Change of Control Prepayment)' 조항이 포함되는 것이 표준이다.
만약 이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면, 영풍·MBK파트너스 연합이 고려아연 이사회를 장악하고 경영권을 가져가는 순간 해당 약정이 '트리거(Trigger)'되어 대출금 전액을 즉시 상환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는 프로젝트 법인(Crucible Metals LLC)의 부도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지급보증을 제공한 고려아연 본사로 부실이 전이되는 '교차 부도(Cross-Default)'를 야기할 수 있는 치명적 리스크다.
● “사람보고 돈 빌려줬다”…핵심 인물 조항도 변수
미국 정부가 이번 투자를 결정한 배경에는 고려아연이 보유한 독보적인 제련 기술과 현 경영진의 실행 능력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때문에 대출 약정에 '핵심 인물(Key Person)' 조항이 포함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조항은 프로젝트를 주도해 온 핵심 경영진이나 기술진이 이탈하거나 교체될 경우, 채권자가 대출 회수를 선언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즉, 영풍·MBK파트너스 측이 경영권을 확보한 뒤 최윤범 회장을 비롯한 현 경영진을 해임하려 할 경우, 미 국방부가 이를 계약 위반으로 간주하고 자금 지원을 철회할 명분이 생기는 셈이다.
미국 정부 입장에서 고려아연은 중국 의존도가 높은 핵심 광물 공급망을 미국 내로 가져올 희소성 있는 파트너다. 때문에 사모펀드로의 경영권 이양은 프로젝트의 안정성을 해치는 중대 사유로 판단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 과거 사례로 본 미국 정부의 개입은?
실제로 미국 정부는 국가 안보와 직결된 기업의 경영권 변동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지난 2018년, 싱가포르계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이 미국 퀄컴을 적대적 인수하려 했을 때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불허했다. 당시 미국 재무부 산하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는 "인수 후 비용 절감을 위해 R&D 투자를 줄일 경우 미국의 5G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2021년 매그나칩반도체 사례도 있다. 당시 중국계 사모펀드인 와이즈로드캐피털(Wise Road Capital)이 한국계 기업인 매그나칩 인수를 시도했으나, 미국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가 기술 유출 우려를 이유로 제동을 걸며 딜 자체가 전격 무산됐다. 미국 정부 자금이 직접 투입되지 않은 순수 민간 기업 간 거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주주의 성격이 미국의 '국가 안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M&A가 가로막힌 대표적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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