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투데이=심두보 기자| 고려아연이 최근 발간한 '2025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는 영풍·MBK파트너스와 치렀던 경영권 분쟁의 궤적이 담겼다. 통상적인 환경·사회·지배구조(ESG) 활동을 나열했던 2024년 보고서와 달리, 올해 보고서는 표 대결이 촉발한 지배구조 재편과 주주환원 정책의 변화를 기록하고 있다.
두 보고서를 비교한 결과,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지배구조(Governance) 부문의 서술 방식에서 나타난다. 지난해 발간된 2024년 보고서는 이사회 내 ESG위원회와 보수위원회 신설 등 일반적인 제도의 도입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당시 이사회 구성 역시 사외이사 7명을 포함해 그 비중이 58.3%를 차지한다는 점을 언급하는 등 평이한 수준의 현황 설명에 그쳤다. 하지만 경영권 분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를 지나 발간된 2025년 보고서는 양상이 전혀 다르다. 치열했던 의결권 경쟁의 결과물이 실제 기업의 정관과 지배구조에 어떻게 이식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핵심은 올해 1월과 3월 연이어 개최된 임시 및 정기 주주총회의 결과 반영이다. 보고서는 경영권 방어와 공세의 핵심이었던 정관 변경 안건들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적시했다. 특히 소수 주주의 권리를 강화하는 집중투표제 도입과 이사 수 상한 설정 등의 안건이 주총 문턱을 넘은 과정이 명시되었다. 이는 경영권 분쟁의 여파가 지분 경쟁을 넘어 제도적 개편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이사회 운영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도 주요하게 다뤄졌다. 고려아연은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이사회의 독립성 확보와 경영진 견제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시장의 요구에 직면했다. 이에 따라 창사 이래 최초로 사외이사를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하는 강수를 뒀고, 이 내용이 2025년 보고서의 지배구조 챕터 전면에 배치됐다. 대표이사와 의장의 분리는 영풍·MBK파트너스 측의 공세를 방어하기 위한 지배구조 투명성 강화 조치로 풀이된다.
표 대결이 낳은 이사회 대수술과 주주친화 정책의 제도화
양측의 치열한 이사 선임 경쟁은 결과적으로 고려아연 이사회의 양적·질적 팽창을 불러왔다. 경영권 분쟁 승리를 위해 우호 지분 확보와 표결 단속이 절실했던 만큼, 이사회 규모 자체가 전례 없이 커진 것이다. 2025년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12월 기준 이사회는 사내이사 3인, 사외이사 13인, 기타 비상무이사 3인으로 재편됐다. 전체 이사 중 사외이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68.4%로 급증했다. 이는 전년도 보고서에 기재된 58.3% 대비 10%포인트 이상 상승한 수치다.
주주환원 정책과 소액주주 소통 채널 역시 분쟁을 거치며 대폭 상향 평준화됐다. 2024년 보고서가 홈페이지를 통한 정보 공개나 통상적인 기업설명회(IR) 개최 등 원론적인 주주 소통 활동을 기술하는 데 머물렀다면, 올해는 결이 다르다. 경영권 분쟁이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주주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쏟아낸 공약들이 실제 제도로 안착한 과정을 담았다. 액면분할, 분기배당 도입, 배당기준일 변경 등 자본시장이 요구해 온 굵직한 주주가치 제고 방안들이 2025년 보고서에 제도적 성과로 기록됐다.
소액주주를 대하는 기업의 태도 변화도 보고서 곳곳에서 감지된다. 고려아연은 이번 보고서를 통해 '주주친화 경영'과 소수주주 보호를 그 어느 때보다 강도 높게 천명했다. 특히 주주총회 시즌에 운영했던 캠페인 페이지를 통한 안건 상세 공개 사례를 우수 소통 채널로 명시했다. 주주들의 질의에 즉각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한 점도 새롭게 추가된 내용이다. 경영권 분쟁이 낳은 절박함이 소액주주 소통 매뉴얼의 전면 개정으로 이어진 것으로 분석된다.
리스크 관리의 패러다임도 완전히 뒤바뀌었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2025년 보고서의 '중대성 평가(Double Materiality Assessment)' 결과다. 전년도 평가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윤리 및 준법경영' 항목이 올해 핵심 이슈(Material Topic)로 새롭게 진입했다. 이는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양측이 주고받은 각종 고소·고발과 법적 공방이 기업 경영의 최우선 위험 요소로 급부상했음을 시사한다.
'사법 리스크' 방어선 구축…컴플라이언스 통제 대폭 격상
윤리·준법 경영이 핵심 이슈로 격상됨에 따라 관련 조직도 대대적인 수술대에 올랐다. 고려아연은 분쟁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법적 리스크에 대응하기 위해 2025년 '컴플라이언스 본부'를 전격 신설했다. 이는 기존 법무팀 수준의 조직을 전사적 통합 리스크를 통제하는 컨트롤 타워로 격상시킨 조치다. 보고서는 해당 본부가 경영진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법적 하자를 사전에 차단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명시했다. 경영권 방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배임 등의 사법 리스크를 원천 봉쇄하겠다는 의지다.
공시 의무 위반에 대한 내부 통제 장치도 강화됐다. 자본시장법상 엄격한 공시 규정을 준수하지 못할 경우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결과다. 보고서는 사내 전자결재 시스템에 '공시 체크리스트 검토 절차'를 새롭게 도입했다고 밝혔다. 실무 부서에서 기안을 올릴 때부터 해당 사안이 공시 대상인지 의무적으로 확인하도록 시스템화한 것이다. 이는 치열한 여론전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공시 누락이나 지연 리스크를 기계적으로 차단하려는 조치다.
특히 '불성실공시법인 지정'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하기 위한 방어막 구축에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될 경우 주식 거래 정지나 벌점 부과 등 시장의 신뢰를 잃는 것은 물론, 표 대결에서도 막대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고려아연은 이러한 외부의 감시와 견제에 대응하기 위해 공시 프로세스를 외부 법무법인 수준으로 고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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