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개월의 혈투…불편한 동거는 2026년에도 계속된다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증권 |심두보 기자|입력

개전: 영풍·MBK파트너스의 기습 (2024년 9월) 반격: 자사주 소각이라는 초토화 작전 (2024년 10월) 위기: 거버넌스의 자충수, 유상증자 철회 (2024년 11월) 방어: 안보 논리의 등장 (2025년 3월) 반전: '워싱턴'을 끌어들인 강력한 한 수 (2025년 12월)

|스마트투데이=심두보 기자| 2024년 9월부터 2025년 12월까지, 장장 15개월간 이어진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은 한국 자본시장 역사상 유례없는 '머니 게임(Money Game)'이었다. 또 지정학적 안보 논리가 사모펀드(PEF)의 적대적 M&A 전략을 어떻게 방어할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로도 남을 것으로 보인다.

MBK파트너스·영풍 연합의 기습적인 공개매수로 촉발된 이 전쟁은 단순한 지분 싸움을 넘어, 총 4조원 이상의 유동성이 투입된 치킨게임 양상으로 치달았다. 2025년 12월 31일 현재, 고려아연은 미국 공급망(Supply Chain) 편입이라는 '외생 변수'를 통해 경영권 방어에 우위를 점한 것으로 평가된다.

2026년에도 이어질 ‘불편한 동거’. 과거 15개월 이뤄진 공방전을 정리했다.

● 개전: 영풍·MBK파트너스의 기습 (2024년 9월)

2024년 9월 13일, 추석 연휴 직전 단행된 영풍·MBK파트너스의 공개매수 선언은 한국 재벌 지배구조의 취약한 고리를 타격했다. 75년 동업 관계의 파탄은 예견된 수순이었으나, PEF가 개입해 경영권 탈취를 시도한 방식은 시장에 충격을 주었다. 초기 공개매수가 66만원은 시장의 적정가치를 반영하지 못한 수치였고, 이는 즉각적인 주가 급등으로 이어졌다. MBK파트너스는 75만원, 최종 83만원까지 가격을 인상해야 했다. 이는 고려아연이 단순한 제조업체가 아닌 2차전지 소재 등 미래 산업의 핵심 자산임을 시장이 재평가하는 계기가 됐다.

● 반격: 자사주 소각이라는 초토화 작전 (2024년 10월)

최윤범 회장의 대응은 '유통 주식 말리기'였다. 베인캐피탈을 우군으로 확보하고 주당 89만원에 자사주 대항 공개매수를 감행했다. 법원이 경영권 방어 목적의 자사주 취득을 배임으로 보지 않으면서, 한국 M&A 시장에서 경영진의 방어 수단은 대폭 확대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고려아연의 재무 건전성은 훼손됐다. 무차입 경영의 신화는 깨졌고, 급증한 차입금에 따른 이자 비용은 기업 가치에 지속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경영권은 지켰으나 회사의 기초 체력은 약화됐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대목이다.

● 위기: 거버넌스의 자충수, 유상증자 철회 (2024년 11월)

최윤범 회장 측이 11월 감행하려던 2조5000억원 규모의 일반공모 유상증자는 전략적 오판이었다. 자사주 소각으로 주주 환원을 외친 직후, 빚을 갚기 위해 주주 가치를 희석시키겠다는 논리는 시장의 신뢰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금융감독원의 정정 요구와 주가 폭락, 여론 악화는 이사회가 대주주의 거수기로 전락했다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 사건은 영풍·MBK파트너스 측에 ‘기존 경영진의 모럴 해저드’라는 강력한 공격 명분을 제공했으며, 최 회장이 이사회 의장직을 내려놓게 만드는 결정적 트리거가 됐다.

● 방어: 안보 논리의 등장 (2025년 3월)

2025년 3월 정기 주주총회는 '자본 논리' 대 '안보 논리'의 대결이었다. 정부가 고려아연의 전구체 기술 등을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하면서 판세가 흔들렸다. 이는 MBK파트너스가 향후 해외 자본에 회사를 매각(Exit)하는 데 치명적인 걸림돌로 작용될 것으로 분석됐다. 국민연금을 위시한 캐스팅보터는 단기 차익보다는 국가 기간 산업 보호라는 명분을 선택했다. 최 회장 측은 이사회 장악력을 유지하며 신승(辛勝)을 거뒀으나, MBK와의 지분 격차는 여전히 3%포인트 내외의 살얼음판이었다.

● 반전: '워싱턴'을 끌어들인 강력한 한 수 (2025년 12월)

2025년 12월, 고려아연이 영풍·MBK파트너스 측에 제대로 한방을 날렸다. 고려아연이 단행한 미국 합작법인(Crucible JV) 관련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 대해 법원이 MBK파트너스의 신주발행금지 가처분을 기각한 것은 이번 분쟁의 '게임 체인저'다. 재판부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대응과 공급망 탈중국화라는 거시적 환경을 경영상 필수 목적으로 인정했다.

이는 과거 삼성물산 합병 사태나 SK 소버린 사태와는 결이 다르다. 과거에는 단순히 주주 가치나 경영권 방어가 쟁점이었다면, 이번 판결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 상황에서, 특정 기업의 경영권은 국가 안보 및 동맹국(미국)의 이해관계와 결부된다"는 새로운 사법적 판단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 참호전: 감시와 견제의 일상화

2026년 3월 주주총회를 기점으로 경영권 분쟁은 전면전에서 국지적인 '참호전' 양상으로 변화할 것이다. 법원의 판결로 고려아연 현 경영진이 급한 불을 껐으나, 영풍·MBK파트너스는 여전히 이사회의 과반에 육박하는 지분을 쥔 단일 최대주주 그룹이다. 이들은 경영권 확보라는 1차 목표가 좌절된 대신, 집요한 '현미경 감시' 전략으로 선회할 가능성이 높다. 이사회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임 이슈를 제기하고, 회계 장부 열람 등 주주권을 행사하는 방식이다.

시장 일각에서는 일부 지분을 블록딜 형태로 정리하며 출구 전략을 모색할 가능성을 점치기도 한다. 경영권 분쟁에서 진다는 것이 수지타산이 안 맞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 적대적 M&A가 결과적으로 실패했어도 그 전쟁에 참전한 PEF가 상당히 높은 수익률을 거둔 사례는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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