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김현정 칼럼

'카드의 정석' 1000만 장에 숨겨진 예술적 상징

오피니언 |김현정 한국화가 | 입력 2026. 08. 06. 08:51
김현정, 〈내숭: 과유불급(過猶不及)〉, 직경 50 cm, 한지 위에 수묵과 담채, 콜라쥬, 2013. (출처: 김현정 아트센터)
김현정, 〈내숭: 과유불급(過猶不及)〉, 직경 50 cm, 한지 위에 수묵과 담채, 콜라쥬, 2013. (출처: 김현정 아트센터)

신용카드는 소비자가 더 많이 사용해야 성공하는 금융상품이다. 반면 소비자에게는 정반대의 규칙이 있다. 필요한 만큼만 써야 자신의 삶을 지킬 수 있다. 사용을 권하는 기업과 절제를 요구받는 소비자. 이 상반된 관계 한가운데에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다’는 뜻의 작품이 들어갔다. 우리카드 ‘카드의 정석’ 시리즈의 첫 번째 디자인이 된 〈내숭: 과유불급〉이다.

화면에는 청록빛 모란이 빈틈없이 피어 있다. 겹겹이 포개진 꽃잎과 잎맥 사이로 한 여성의 옆모습이 드러난다. 그런데 인물은 꽃향기를 음미하는 대신 손으로 코를 틀어막고 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부귀와 풍요를 상징하는 꽃밭이지만, 그 풍요가 지나치게 밀려든 순간 향기는 숨 막히는 과잉으로 바뀐다.

한국화는 보이는 대상을 닮게 그리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를 읽고, 그 소재가 오랜 시간 축적해 온 상징을 해석하는 예술이다. 소나무는 장수를, 대나무는 곧은 지조를, 연꽃은 청정함을 뜻한다. 무엇을 그렸는가는 곧 무엇을 기원하고 말하는가와 연결된다.

모란은 그중에서도 의미가 분명한 소재다. ‘화중왕’과 ‘부귀화’로 불리며 부귀, 영화, 풍요와 길상을 상징해 왔다. 궁중 장식과 혼례 병풍, 민화와 도자기에 모란이 자주 등장한 까닭도 단지 꽃이 화려해서가 아니다.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의 삶에 복되고 풍성한 기운이 깃들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숭: 과유불급〉은 그 익숙한 상징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는다. 모란을 화면 가득 피워 놓고 그 중심에 코를 막은 인물을 배치한다. 성공도, 관심도, 아름다움도 넘치면 피로가 될 수 있다는 역설이다. 좋은 향기조차 지나치면 숨을 참게 된다. 전통적인 길상의 소재가 현대 소비사회의 과잉을 경계하는 이미지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이 작품은 필자가 대학 시절 첫 갤러리 초대 개인전을 제안받았던 경험에서 출발했다. 당시 갤러리가 원한 것은 판매하기 좋은 화사한 꽃그림이었다. 그러나 필자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한복을 입은 인물이 동시대의 일상을 살아가는 21세기 풍속도, 곧 〈내숭 시리즈〉였다. 젊은 작가가 시장의 요구를 완전히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대신 모란을 원 없이 그려 주되, 그 향기를 견디지 못하는 인물을 화면 안에 남겼다. 요구를 따르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그 요구에 대한 불편함을 감추지 않은 것이다.

상업성에 대한 작은 저항에서 태어난 작품이 훗날 대량 발급되는 금융상품의 얼굴이 됐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바로 그 역설이 카드의 성격과 맞아떨어졌다. 모란은 카드를 지닌 사람에게 부귀와 풍요의 기운을 전하고, 코를 막은 인물은 무분별한 소비를 경계한다. 풍성한 혜택을 누리되 지나치게 사용하지 말라는 두 개의 메시지가 한 장의 카드 안에서 공존한다.

우리카드와의 협업은 완성된 그림을 카드 위에 그대로 복제하는 작업이 아니었다. 첫 번째 〈과유불급〉을 시작으로 약 2년 동안 여러 상품군의 디자인을 확장하며 카드 전체의 새로운 시각 체계를 만드는 일이었다. 첫 디자인에서는 작품 속 인물과 모란, 먹선과 한지의 질감을 카드의 비례와 기능에 맞춰 다시 나눴다. 원형 작품을 가로로 긴 플라스틱 카드에 단순히 축소하면 인물과 꽃이 모두 힘을 잃기 때문이다. 작품을 면으로 분할하고 필요한 부분을 확대하거나 덜어내며, 카드 한 장을 또 다른 화면으로 재구성했다.

대표 색상으로는 성별과 연령에 따른 선호의 차이가 비교적 적은 민트 계열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 색은 유행하는 파스텔 컬러를 적용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필자는 민트빛을 궁궐과 사찰의 단청에서 볼 수 있는 삼록(三綠)과 양록(洋綠)의 맑은 녹색 계열을 현대적으로 번역한 색으로 보았다. 삼록은 구리 계열의 녹색 안료이고, 양록은 근대 이후 서양에서 유입돼 단청에 사용된 인공 합성 녹색 안료다. 전통 단청에는 이 밖에도 하엽, 뇌록, 석록 등 다양한 녹색 안료가 사용됐다.

엄밀히 말하면 민트색은 오방정색인 청·적·황·백·흑 다석 색에 해당하지 않는다. 전통 색채 체계에서는 청색과 황색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오간색의 녹색에 가깝다. 다만 그 근간에는 오방색의 청색이 가진 의미가 흐른다. 청은 오행에서 나무인 목(木), 방위로는 동쪽, 계절로는 봄에 해당한다. 해가 떠오르고 새싹이 자라는 방향의 색이므로 생성과 성장, 생명과 새로운 시작을 상징한다.

모란이 부귀와 풍요를 기원한다면, 민트빛은 봄처럼 새롭게 시작하고 자라나는 기운을 더한다. 필자는 청의 생명력과 녹색의 안정감이 금융상품에 필요한 신뢰와 편안함으로 이어지기를 바랐다. 전통 색채를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오래된 색의 기억과 상징을 오늘날 사람들이 매일 지니는 물건 안으로 옮기고자 했다.

카드 표면에는 번쩍이는 광택 대신 불투명한 무광 질감을 적용했다. 모란의 촘촘한 선이 플라스틱의 강한 반사에 묻히지 않게 하고, 손에 쥐었을 때 차분하고 부드러운 인상이 남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화면은 황금비율을 바탕으로 분할해 모란의 밀도와 인물의 여백, 카드 정보가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조정했다. 한국화의 섬세한 선묘와 한지의 부드러운 질감이 작은 카드 위에서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름다움만큼 기능과 가독성을 고려해야 했다.

이후 ‘카드의 정석’ 디자인은 약 2년에 걸쳐 다양한 상품으로 확장됐고, 협업 카드의 전체 발급 규모는 누적 1000만 장 이상으로 집계됐다. 발급 장수는 실제 보유자 수와 동일하지 않지만, 한국 인구의 약 5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의 카드에 한국화의 이미지가 들어갔다는 점은 의미가 크다. 미술관에 전시된 한 점의 작품이 수많은 사람의 지갑 속으로 이동한 것이다.

아트 컬래버레이션의 경제적 가치는 작품을 상품에 붙였다는 사실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카드 혜택과 적립률은 경쟁사가 비슷하게 설계할 수 있다. 그러나 소비자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낼 때마다 떠올리는 이미지와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쉽게 복제되지 않는다. 예술은 상품의 기능을 대신하지는 않지만, 기능만으로 만들 수 없는 기억과 정체성을 브랜드에 부여한다.

그림의 뜻을 잃으면 아트 컬래버레이션은 장식에 머문다. 반대로 작품의 상징과 상품의 목적이 정확히 만나면 소재와 색, 질감 하나까지 브랜드의 언어가 된다. 〈내숭: 과유불급〉에서 모란은 단순한 꽃무늬가 아니었고, 민트색은 단순히 예쁜 배경색이 아니었다. 하나는 풍요를 기원하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성장의 기운을 전하며, 코를 막은 인물은 그 모든 것이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소비를 권하는 카드가 절제를 말하고, 상업성에 대한 저항에서 태어난 작품이 금융상품의 대표 이미지가 됐다. 어쩌면 ‘카드의 정석’이 처음부터 품고 있던 가장 중요한 혜택은 할인율이나 적립률만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풍요를 누리면서도 멈출 때를 아는 것, 그것이 소비의 진짜 정석은 아닐까.

한국화가 김현정은 선화예중·예고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동양화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2026년 8월 박사학위를 취득할 예정이다. 현대 한국인의 삶과 감정을 유머와 풍자로 풀어낸 21세기 풍속도 〈내숭 시리즈〉로 널리 알려졌으며, 작품은 초·중·고 교과서 31종에 수록되었다. EBS 〈해요화 해요〉의 ‘댕기언니’로 활동했으며 서울시와 희망브리지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현재 MBC 드라마 〈가족관계증명서〉와 작품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는 등 미술과 방송, 기업 브랜드를 연결하는 다양한 아트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30만 팔로워와 소통하며 국내외 전시와 강연을 통해 한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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