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투데이=심두보 기자|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국내 의결권 자문사 수장들의 공개 발언이 업계 안팎의 시선을 끌고 있다. 서스틴베스트 류영재 대표는 주총 당일 개인 SNS에, 한국의결권자문(KORPA) 정석호 대표는 주총 다음날 법인 공식 발간물을 통해 각각 고려아연 현 경영진 측에 우호적인 입장과 함께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구조에 대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내놨다. 일부 시장 참여자들은 이 같은 행동이 의결권 자문사에게 요구되는 독립성 원칙과 조화를 이루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국내 자문사 대표들의 현 경영진 옹호·국민연금 비판
서스틴베스트 류영재 대표는 고려아연 정기 주총 당일인 3월 2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고려아연 사태가 던진 질문: 거버넌스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고려아연에 대해 "44년 연속 연간 영업이익 흑자, 104분기 연속 흑자 기록은 수십 년간 축적된 공정 효율과 리스크 관리 역량의 결과"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MBK파트너스에 대해서는 "사모펀드는 구조적으로 투자 후 5~7년 내 엑시트를 염두에 둔 전략을 추구한다"고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영풍에 대해서도 "석포제련소의 환경오염·인허가 위반 등으로 최근 5년간 제련 부문에서 영업적자를 지속해온 것으로 분석된다"며 경영 역량에 의문을 표했다.
류 대표는 나아가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구조에 대해서도 "현재 국민연금은 기업을 직접 분석하고 투자해 온 기금운용본부가 아니라 외부 인사 중심의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에 중요 안건 판단을 사실상 넘겨놓고 있다"며 "투자 논리와 의결권 행사를 분리시켜 정치·여론·이해집단의 힘겨루기에 따라 판단이 왜곡될 가능성을 키운다"고 비판했다. 서스틴베스트는 주총 6일 전인 3월 18일 발표한 의안분석보고서에서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과 고려아연 측이 추천한 이사 후보 전원에 찬성을 권고한 바 있다.
한국의결권자문 정석호 대표는 주총 다음날인 3월 25일 자사 명의의 공식 간행물 '거버넌스 Essay'에 직접 서명한 글을 발표했다. 제목은 〈고려아연 주총이 남긴 과제: 의결권 행사는 투자 판단의 연장선이어야 한다〉였다.
에세이에서 정 대표는 이번 고려아연 사례를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주주환원 정책의 지속적 추진, 실질적인 경영성과와 중장기적 기업가치 제고 측면이 균형 있게 고려되어야 하며, 글로벌 핵심광물 공급망에서의 산업적 위상과 장기 투자 전략의 실행 역량도 기업가치 판단에서 충분히 반영되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썼다. 이어 "경영권 분쟁의 국면임을 감안할 때 분쟁 상대방의 실적과 리스크 관리 이력이나 역량도 역시 같은 잣대로 평가되어야 의결권 판단은 비로소 균형을 갖는다"고 덧붙였다.
국민연금을 향한 비판도 담겼다. 정 대표는 에세이에서 "글로벌 연기금들은 의결권을 투자 판단의 연장선에서 바라보며 기업의 장기적 가치 창출 능력과 전략 실행 가능성까지 함께 고려하는 접근을 취하고 있다"며 "의결권 판단 주체와 투자 판단 주체가 일치할 때, 그 결정은 시장에서 설명 가능성을 갖는다"고 밝혔다. 한국의결권자문은 주총 직전 고려아연 측 이사 전원에 찬성, MBK·영풍 측 추천 이사 전원에 반대 권고를 발표한 바 있다.
개인 SNS에 올린 류 대표의 글과 달리, 정 대표의 에세이는 한국의결권자문(KORPA) 로고가 표지에 박힌 법인 공식 발행물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ISS·글래스루이스 등 글로벌 자문사 기준은 '독립성'
의결권 자문사의 독립성 기준은 글로벌 차원에서 오랫동안 논의돼 왔다. 유럽증권시장감독청(ESMA)의 권고를 받아 ISS, 글래스루이스 등 6개 주요 자문사가 채택한 '주주의결권 리서치 모범 기준(BPP, Best Practice Principles for Shareholder Voting Research)'은 서비스 품질, 이해충돌 관리, 커뮤니케이션 정책 세 축으로 자문사의 행동 기준을 제시한다. 핵심은 독립성이다. 이 원칙은 자문사가 이해충돌을 식별·공시·관리하고, 어드바이스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구체적 행동 기준도 있다. ISS는 인수합병 제안, 경영권 분쟁, 논쟁적 안건이 포함된 주주총회와 관련해 피자문 기업이 보고서를 사전에 검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ISS의 윤리강령은 임직원이 클라이언트의 최선의 이익에 부합하게만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글래스루이스 역시 피자문 기업과의 관계에서 독립성을 유지하는 구조적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음을 공시한다.
이 같은 글로벌 기준은 분쟁 국면에서 자문사가 특정 당사자를 지지하는 공개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는 방향을 전제한다. 특히 법인 공식 발행물을 통해 특정 경영권 분쟁의 결과를 평가하고 한 측 논리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기관투자자(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비판하는 것은, 글로벌 자문사에서는 통상 볼 수 없는 행동 양식이다.
커지는 독립성 논란…규제는 부재
논란의 핵심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행위 주체의 성격 문제다. 류영재 대표의 SNS 게시글은 개인 채널을 통한 표현이라는 점에서 법인과의 경계가 다소 모호하다. 반면 정석호 대표의 거버넌스 에세이는 한국의결권자문 법인 명의로 발행된 공식 문서이며, 말미에 대표 본인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 의결권 자문사가 특정 경영권 분쟁을 법인 공식 발행물에서 직접 거론하며 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를 사실상 비판한 것은, 자문사의 클라이언트가 기관투자자라는 사실과 충돌하는 측면이 있다.
두 번째는 타이밍과 방향성의 문제다. 두 자문사 모두 주총 직전 고려아연 측에 우호적인 의결권 권고 보고서를 발행했다. 이 상태에서 주총 이후에 고려아연 현 경영진 측 논리를 지지하고 국민연금의 다른 판단을 비판하는 내용을 공개 발표하면, 이미 발행된 보고서의 독립성에 대한 외부 인식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현재 국내에는 의결권 자문사의 행동 기준을 명시한 별도 법령이 없다. 자본시장법상 투자자문업으로 분류되는 일부 자문사는 금융투자업 규정의 적용을 받지만, 대표 개인의 공개 발언이나 법인의 시사 에세이 발행을 규율하는 명시적 규범은 부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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