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서울의 '정서법'과 뉴욕의 '상장법', 그 사이에 낀 김범석

오피니언 |심두보 기자|입력

|스마트투데이=심두보 기자| 한국 소비자들에게 쿠팡은 ‘편리함의 대명사’이지만, 동시에 ‘불통의 아이콘’으로 불리기도 한다. 물류센터 화재나 노동 환경 이슈, 플랫폼 갑질 논란 등이 불거질 때마다 여론은 김범석 의장의 직접적인 사과와 등판을 요구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전문 경영인의 대리 사과이거나, 계산된 침묵이다.

이를 두고 국내에서는 오너의 도덕적 해이나 책임 회피, 혹은 한국적 정서에 대한 무지라고 비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김 의장의 침묵을 단순히 ‘개인의 성향’ 탓으로만 돌리면 본질을 놓치게 된다. 그가 입을 다무는 진짜 이유는 쿠팡이 한국 기업이 아닌,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된 ‘쿠팡 Inc.’이기 때문이다.

김범석 의장에게 적용되는 룰은 한국의 ‘국민 정서법’이 아닌, 미국의 살벌한 ‘자본시장법’이다. 이 두 세계의 문법은 정반대로 작동한다. 한국에서 사과가 ‘비 온 뒤 땅을 굳게 하는’ 도덕적 해법이라면, 미국 법정에서 사과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법적 자백(Admission of Liability)이다.

가장 치명적인 위협은 미국의 ‘증거 개시 제도(Discovery, 이하 디스커버리)’다. 이는 소송 당사자가 재판 전 서로 가진 증거를 강제로 공개하는 절차다. 한국의 제한적인 문서 제출 명령과 달리, 미국의 디스커버리는 기업의 내장을 샅샅이 뒤집어놓는다.

만약 김 의장이 사고에 대해 “내 불찰이다”라고 사과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는 즉시 미국 주주 소송 로펌들의 먹잇감이 된다. 그들은 이 사과를 근거로 디스커버리를 신청할 것이다. “CEO가 불찰을 인정했으니, 그 불찰을 입증할 지난 3년 치 이메일, 회의록, 사내 메신저 대화 내용을 전부 제출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실무진이 비용 절감을 논의한 메일이나, 안전 문제를 지적한 내부 보고서가 하나라도 나온다면 이는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이 된다. CEO의 사과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알고도 방치했다’는 고의성을 입증하는 자물쇠 열쇠가 되는 셈이다.

더구나 미국 상장사 CEO의 제1 의무는 주주 가치 보존이다. 한국적 정서에 부합하려다 회사에 막대한 배상 책임을 지우는 것은, 미국 주주들 입장에서 명백한 배임 행위다. 주가 하락에 민감한 월스트리트 투자자들은 CEO의 ‘감성적 대응’을 무능력으로 간주하고, 즉각적인 집단소송을 제기한다.

일본 도요타 사태 때 아키오 사장이 보여준 ‘도게자’ 사과와 비교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 법정에서는 사과가 ‘개전의 정’으로 참작되어 형량을 줄여주지만, 미국 법정에서는 징벌적 손해배상의 근거가 될 뿐이다. 법적 환경이 다르니 CEO의 생존 전략도 다를 수밖에 없다.

2024년 1월 31일, 미국 상원 청문회에 불려 나온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의 사과도 철저히 계산된 것이었다. 그는 “여러분이 겪은 고통에 대해 죄송하다”고 했을 뿐, “우리 서비스가 원인이다”라고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인간적 유감을 표하면서 법적 책임은 피해 가는 고도의 줄타기였다. 김범석 의장이 구사하는 화법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쿠팡은 한국 땅에서 한국인을 고용해 장사하지만, 기업의 심장은 델라웨어주에 있고 뇌는 월스트리트에 있다. 김 의장이 한국 국회 청문회 대신 전문 경영인을 내세우는 것은, 본인 등판 시 발생할 수 있는 발언의 리스크를 원천 차단하라는 미국 변호인단의 강력한 권고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김범석 의장의 행보는 개인적 성향에 의한 소통 부재라기보다, 미국 상장사가 갖춰야 할 법적 리스크 관리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로 해석해야 한다. 그는 현재 한국 재벌 총수에게 요구되는 정무적 리더십이 아닌, 미국 회사법과 증권법의 테두리 안에서 주주 가치를 방어해야 하는 미국 기업 CEO로서의 책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시장이 요구하는 높은 수준의 사회적 책임과 미국 자본시장이 강제하는 법적 방어 논리 사이에는 명백한 구조적 괴리가 존재한다. 이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 한, 쿠팡 경영진에게서 한국적 정서에 부합하는 전향적인 태도 변화를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는 단순한 기업 윤리의 차원을 넘어, 글로벌 스탠다드와 지역 정서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시스템적 딜레마’다.

물론 이것이 김범석 의장에게 면죄부가 될 순 없다. 미국 주주의 지갑을 지키기 위해 한국 소비자의 마음을 잃는다면, 장기적으로 쿠팡이라는 기업의 존립 기반인 '시장' 자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법적 리스크 관리가 '경영의 전부'는 아니다. 침묵이 당장의 소송은 막을지 몰라도, 한국 시장에서의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자산은 서서히 갉아먹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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