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투데이=안효건 기자| "이번 결정은 최근의 단기적인 주가 흐름과 무관하며 약 2주 전부터 신중한 내외부 논의를 거쳐 내린 결과입니다. (중략) 2025년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추가적인 자금 조달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기에 이번 결정을 내리기까지 많은 고민과 논의를 거듭했습니다."
지난달 30일 서범석 루닛 대표가 2500억원 규모 주주 배정 유상증자를 발표하며 주주들에게 보낸 서한 일부다. 핵심은 자금이 필요하게 될지 지난해까지는 몰랐다가 최근 2주 간 논의했다는 것이다. 이 해명 개연성이 주주가치 훼손을 가르는 핵심으로 부상한다.
● 재무적 명분 확실한 유증, 서범석 대표도 자신감
이번 유증 명분은 뉴질랜드 기업 볼파라를 인수하며 발생한 전환사채(CB) 풋옵션(조기상환청구권) 리스크 해소다. 2024년 5월 루닛은 볼파라를 2500억원에 인수하기 위해 1700억원 규모 CB를 발행했다. 옵션 행사 가능 시점은 발행일로부터 2년 뒤인 올해 5월부터다.
CB 조건과 루닛 재무제표를 뜯어보면 유증 명분에 힘이 실린다. 루닛이 보유한 대부분 미상환 CB 전환가는 5만2846원이다. 지난달 루닛 평균 종가 4만881원을 큰 폭 웃돈다. 주가가 전환가에 못 미치면 투자자들이 CB를 주식 전환하지 않고 투자금 상환을 요구할 가능성이 현실화한다. 서 대표도 주주서한에서 "최근 몇 달간 지속된 주가 압박"을 결정적 요인으로 꼽았다.
루닛이 이 빚을 갚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지난 3분기 말 기준 루닛 연결기준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254억원에 불과하다. 이자를 따지지 않고 CB 빚만 고려해도 현금보다 6배 이상 많다.
그렇지 않아도 루닛은 매년 수백억원씩 현금을 까먹는 상황이다. 회사 영업 현금흐름은 2022년 -530억원, 2023년 -365억원, 2024년 -657억원을 기록했다. 2025년 3분기에도 420억원 현금이 영업활동에서 빠져나갔다.
서 대표는 앞선 볼피라 투자와 이번 유증 등이 현재 상황을 뒤집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2일 연 간담회에서 "볼피라 투자는 짧게 보면 과한 결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3년, 5년, 10년을 놓고 보면 잘한 결정”이라고 자평했다.
● 자신감 대가는 주주들이, 가치훼손 무방비 노출
관건은 서 대표가 주가 하락에 따른 상환 리스크에 정말 무방비했는지, 혹은 인지하고도 주주들을 기망했는지다.
2024년 CB 발행 당시 루닛 주가는 이미 추세적 하락세였다. 2024년 첫 거래일을 7만9400원으로 시작한 주가는 CB 발행 전인 4월 19일 4만9000원으로 5만원대를 내줬다. 전환가 5만2846원인 CB 풋옵션 행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회사는 지난해 3월에도 단기간 유증이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주가는 해당 월 마지막 거래일에도 4만9300원으로 5만원을 밑돌았다. 회사 공언을 믿고 주식을 계속 보유하거나 새로 매수한 투자자들로서는 강제로 주머니를 열게 됐다.
이번 유증은 사실상 경영진이 주주들 지분을 팔아 회사 빚을 갚겠다는 뜻이다. 유증으로 조달할 자금 중 985억원은 CB 조기상환 대응 자금이다. 나머지 자금 중 단기 차입금 상환에 쓰는 비용도 393억원이다. 기존 주주 주식 가치는 유증 규모(회사 시가총액 21.6%)만큼 희석될 전망이다.
이로 인해 최근 상승세를 그렸던 주가는 다시 고꾸라졌다. 루닛 주가는 지난 21일 3만7700원에서 유증 발표 전인 29일 4만9050원까지 30.1% 상승했다. 5만원대 회복을 시도하던 주가는 이날 3만9400원으로 마쳐 19.7% 급락했다.
일련의 과정에서 주주가치 훼손에 대한 루닛 대비는 전무했다. 회사 관계자는 2024~2025년 풋옵션 리스크에 어떤 대응 전략을 구상했느냐는 질의에 “특별한 전략은 없었다”면서 “그보다는 CB로 조달한 자금을 통한 성장 전략이 더 큰 목표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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