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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김현정 칼럼

지폐 속 신사임당이 밖으로 나온 이유

오피니언 |김현정 한국화가 | 입력 2026. 10. 01. 13:54

돈은 매일 사람들의 손을 거친다. 접히고 구겨지며 때로는 낙서가 남는다. 익숙한 물건인 만큼 화폐에 담긴 이미지와 기술, 제작 비용까지 함께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훼손된 지폐는 결국 새 지폐로 교체된다. 그 비용은 사회 전체가 부담한다. 한국조폐공사와의 아트 컬래버레이션은 화폐를 단순한 결제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으로 다시 보게 하는 데서 출발했다.

필자는 아트 컬래버레이션을 이미지를 상품에 빌려주는 작업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기업이 가진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먼저 듣고, 사람들이 그 문제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작품의 이야기로 옮기고자 한다. 예술은 장식이 아니라 메시지를 오래 남게 하는 언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폐공사의 고민은 분명했다. 화폐 훼손이 반복되고, 교체 비용도 계속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를 “지폐를 깨끗이 쓰자”는 캠페인 문구로만 전달하기보다, 사람들이 지폐 자체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화폐 도안은 기술의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미술적 판단이 쌓인 이미지다.

우리가 손에 쥐는 지폐 속 초상은 사진을 그대로 복제한 것이 아니다. 역사 자료와 표준영정을 바탕으로 화가가 재현한 회화적 이미지가 화폐 도안으로 옮겨진다. 지폐 속 얼굴에도 해석과 선택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화폐는 숫자만 적힌 종이가 아니라 이미지와 인쇄 기술, 보안 장치가 결합된 결과물로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5만원권은 신사임당 초상 하나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전통 회화에서 가져온 소재와 문양, 요판 인쇄 특유의 선과 질감, 여러 보안 요소가 한 장 안에 겹쳐 있다. “화폐를 작품으로 보자”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이미 지폐 안에 들어 있는 미술적 성격을 다시 인식하자는 뜻에 가깝다.

그래서 작품 〈내숭: 치명적인 유혹〉에서는 5만원권 속 신사임당을 화면 밖으로 꺼내 놓았다. 작품 뒤에는 거대한 5만원권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그러나 신사임당이 있어야 할 초상 자리만 비어 있다. 지폐 안에 고정돼 있던 인물이 현실로 이동하면서 남은 빈자리는 관람자의 시선을 다시 지폐로 돌린다.

신사임당이 오늘의 한국에 산다면 어떤 모습일까. 필자는 그를 교육비의 압박을 체감하는 부모로 상상했다. 화면 속 여인은 단아한 한복 차림으로 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책장 안에는 스마트폰이 숨겨져 있다. 겉으로는 교양과 절제를 드러내지만, 속으로는 즉각적인 자극과 정보에 기대는 모습이다.

작품 제목의 ‘내숭’은 이처럼 겉과 속의 간극을 뜻한다. 한국화는 소재를 읽는 그림이다. 한복은 단정함과 규범을, 책은 교양과 교육을 상징한다. 반면 스마트폰은 즉시성과 산만한 욕망을 떠올리게 한다. 이 세 요소가 한 화면에서 만날 때, 작품은 바르게 살고 싶지만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생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신사임당은 완벽한 위인이 아니라 우리와 비슷한 긴장을 지닌 인물로 읽힌다.

바닥에 흩어진 골드바도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여인은 책을 읽는 듯하지만 시선은 자연스럽게 금빛으로 향한다. 작품에 한국조폐공사의 골드바를 넣은 이유다. 교육을 향한 욕망은 자산을 향한 욕망과 맞닿아 있다. 더 나은 기회를 바라는 마음 뒤에는 늘 경제적 현실이 따른다. 작품 속 ‘유혹’은 스마트폰만이 아니라 삶을 움직이는 돈 자체이기도 하다.

재료 역시 메시지를 강화한다. 필자는 인물을 먼저 그리고, 그 위에 직접 염색한 얇은 한지를 덧붙여 반투명한 한복을 만든다. 겉으로는 단정하고 우아해 보여도 속마음까지 완전히 숨길 수는 없다는 뜻이다. 한복 자락 아래 스마트폰과 골드바를 배치한 것도 ‘현모양처’라는 이름 뒤에 인간적인 욕망과 현실 감각이 함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 협업의 핵심은 조폐공사의 고민이 작품의 서사로 번역됐다는 데 있다. 캠페인 문구는 빠르게 이해되지만 쉽게 잊힌다. 반면 지폐 속 인물이 지폐 밖으로 걸어 나오고, 병풍 속 빈자리와 현실의 인물이 마주하는 장면은 돈 한 장을 다시 보게 만든다. 단순히 낙서하지 말자는 말보다, 이 한 장이 얼마나 정교한 이미지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방식이다.

프로젝트는 작품 한 점에서 끝나지 않았다. 조폐공사가 후원한 〈쇼미더머니展〉으로 확장됐고, 달력으로도 제작돼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됐다. 전시와 인쇄물, 생활 속 경험으로 이어진 아트 컬래버레이션이었다.

〈내숭: 치명적인 유혹〉에서 신사임당은 5만원권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남긴 빈자리는 오히려 지폐를 더 자세히 바라보게 한다. 화폐의 액면가는 숫자로 정해진다. 다만 돈을 함부로 다루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 숫자 바깥의 이미지와 이야기 속에 더 선명하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화가 김현정은 선화예중·예고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동양화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2026년 8월 박사학위를 취득할 예정이다. 현대 한국인의 삶과 감정을 유머와 풍자로 풀어낸 21세기 풍속도 〈내숭 시리즈〉로 널리 알려졌으며, 작품은 초·중·고 교과서 31종에 수록됐다. EBS 〈해요와 해요〉의 ‘댕기언니’로 활동했고 서울시와 희망브리지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현재 MBC 드라마 〈가족관계증명서〉와 작품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는 등 미술과 방송, 기업 브랜드를 연결하는 다양한 아트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30만 팔로워와 소통하며 국내외 전시와 강연을 통해 한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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