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투데이=이재수 기자| 서울에서 20년 넘게 청약통장을 납입해 온 A씨는 요즘 통장을 해지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분양가는 끝없이 오르고, 대출은 꽁꽁 묶이면서 수십억 원의 현금이 없으면 청약은 사실상 '그림의 떡'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20여 년 전 어렵게 마련한 소형 아파트를 발판삼아 더 넓은 집으로 갈아타려는 ‘주거 사다리’의 꿈은 이제 실현 가능성이 사라졌다.
청약제도는 서민의 내 집 마련을 돕기 위해 출발했다. 그동안 누구나 꾸준히 납입해 점수를 쎃으면 당첨 가능성이 높아지는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최근 서울, 특히 강남권의 청약 결과를 보면 사정은 달라졌다. 청약은 더 이상 성실하게 점수를 쌓아온 서민들을 위한 제도라기 보다는 오히려 수십억 현금을 가진 자산가들의 재테크 수단으로 변질됐다는 비판이 힘을 얻고 있다.
그 상징적 장면이 바로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트리니원’이다. 래미안트리니원의 84㎡A 타입의 경쟁률은 457대 1, 청약 최저 당첨 가점은 최저는 70점에 달했다.
서울에서 높은 경쟁률은 어쩔 수 없다쳐도 문제는 ‘최저 당첨 가점’이다. 현재 가점제에서 4인 가족이 받을 수 있는 사실상 만점은 69점. 이는 4인 가족이 만점을 받아도 당첨확률은 0%라는 얘기다.
청약가점 보다 더 큰 문제는 현금 보유력이다. 래미안트리니원의 84㎡ 분양가는 26.3억~27.4억 원에 책정돼 입주하려면 현금 25억 원 이상이 필요하다. 정부의 10·15 대책에 따라 25억 초과 분양 아파트의 잔금대출은 2억 원으로 제한됐기 때문이다.

최근 입주를 시작한 서울 강남구 청담동 '청담 르엘'은 입주전부터 국민평형(84㎡)이 60억 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됐다. 분양가 25억 원대의 2배가 넘는 30억원 이상을 번 셈이다. 이 단지 역시 높은 분양가가 서민들의 접근을 막아 세웠다.
이들 아파트는 수십억원의 시세차익이 담보돼 로또 청약으로 불리지만 그 ‘로또’에 응모할 수 있는 자격은 현금 수십억원을 동원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위해 존재하는 셈이다.
수년 전 분양가로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는 '무순위 청약' 마저 무주택자만 청약할 수 있게 제도가 바뀌면서 1주택자 청약통장 보유자들은 남아있는 일말의 '로또 청약' 기회마저 사라졌다.
이런 흐름 속에 청약통장 해지자는 빠르게 늘고 있다. 지난달 전국 청약통장 가입자는 전월 대비 약 3.6만 명 감소했다. 올해 들어 가장 큰 감소폭이다. “4인 가족 만점도 떨어지는데 왜 납입하나.” “당첨돼도 현금이 없어 못 들어간다.”는 자조속에 청약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고 있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청약 제도의 공정한 접근성을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전문가는 "지금처럼 대출은 묶고 분양가는 계속 오르게 방치한 채, 가점만 붙드는 방식으로는 서민의 내 집 마련을 돕는다는 청약의 본래 취지를 되살릴 수 없다."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