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투데이=김종현 기자| “우리는 눈앞의 실적에 집착하다 시장의 변화를 읽지 못해 혹독한 대가를 치렀던 아픈 경험을 갖고 있다. 미래사업을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올해 8월 경기 성남시 HD현대 글로벌R&D센터(GRC)에서 열린 사장단 회의에서 그룹사 경영진에게 당장의 실적에 만족하지 말고 10년, 20년 뒤를 내다보는 경영을 주문했다. 과거 호황기에 안주하다 시장 변화에 제때 대응하지 못했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이달 회장 취임 1주년을 맞는 정기선 회장은 HD현대의 미래비전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업 호황으로 확보한 실적과 기술 경쟁력을 기반으로 주력 사업의 체질을 개선하는 동시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며 그룹의 성장 기반을 넓히겠다는 복안이다.
21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정 회장의 지난 1년 경영 행보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요약된다. 사업 재편과 생산거점 확대를 통한 중장기 성장동력 확보, 인공지능(AI)과 자동화 로봇을 활용한 제조업 혁신, 미래사업 선점이다.

사업 재편·글로벌 생산거점 확대
특히 이날 HD현대에 따르면 정 회장이 취임 이후 가장 먼저 속도를 낸 분야는 핵심사업 재편을 통한 경쟁력 강화와 해외 사업장 확대를 통한 글로벌 수요 대응이다.
정 회장은 지난해 12월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를 합병하고, 올해 1월에는 HD현대건설기계와 HD현대인프라코어를 통합한 HD건설기계를 출범시키며 조선과 건설기계 사업의 새로운 성장체계를 구축했다.
이를 통해 회사는 선종별 생산시설 운영을 최적화하고, 확대되는 글로벌 함정시장에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통합 HD현대중공업은 이를 바탕으로 2035년 매출 37조 원, 방산 부문 매출 10조 원을 달성한다는 목표다.

건설기계 부문은 생산과 연구개발, 영업 역량을 결집해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현대와 디벨론 등 기존 브랜드의 시장 경쟁력은 유지하면서 통합 운영에 따른 시너지를 극대화한다는 전략이다.
글로벌 생산거점 확대에도 주력하고 있다. 국내 조선소의 기술 경쟁력을 바탕으로 해외 생산 네트워크를 구축해 글로벌 수요 변화에 대응하고, 기술 수출 중심의 신사업 모델을 통해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겠다는 전략이다.
대표적인 곳이 베트남과 필리핀이다. HD현대는 이들 생산거점을 활용, 선종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해 탱커 등 중국에 빼앗긴 일반상선 시장에서 경쟁력을 되찾는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 HD현대는 HD현대베트남조선의 생산능력을 기존 연간 15척에서 2030년 23척까지 확장할 예정이다. HD현대필리핀 역시 올해 7월 11만 5,000톤급 석유화학제품운반선(PC)을 진수한 상태로, 2030년 유조선 10척을 건조할 수 있는 생산체계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신시장 개척·중장기 성장동력 확보
미래 성장이 예상되는 시장의 선점 노력도 강화하고 있다. 먼저 인도에서 조선업 노하우를 수출, 신규 조선소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정 회장은 올해 1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를 직접 만나 조선업 협력 방안을 논의했으며, 4월 인도 NSHIP TN 및 사가르말라금융공사와 ‘신규조선소 설립 투자에 필요한 핵심 인프라 구축과 합작법인 설립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고, 인도 타밀나두주 정부와 합작 조선소 건설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현지 조선사들과의 협력을 통해 상선과 함정시장을 동시에 공략하고 있다. HD현대는 지난해 4월 미국 최대 방산 조선사인 헌팅턴잉걸스(HII)와 선박 건조 생산성 향상 및 첨단 조선 기술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올해 8월 HD현대가 자체 개발한 지능형 용접 시스템을 적용하는 시범사업에 착수하며 협력범위를 넓히고 있다. 상선 분야에서는 에디슨 슈에스트 오프쇼어(ECO)와 선박 설계와 건조 기술을 지원 등을 통해 2028년까지 중형급 컨테이너운반선을 공동 건조하기로 했다.
미국 방산기업 안두릴(Anduril)과 무인수상정 공동 개발을 추진하며 미래 해군 전력 시장으로 협력 범위를 확대하는 한편, 미국 키윗(Kiewit)과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통해 현지 선박 건조 및 블록·모듈 생산 협력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협력은 국내 조선소에서 축적한 설계·생산 기술을 해외 현지에 적용하는 새로운 사업 모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 HD현대는 미국의 조선업 재건에 참여하는 동시에 기술과 기자재 공급, 현지 공동 건조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며 글로벌 조선 시장에서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정 회장은 조선업 경쟁력 확보를 넘어 글로벌 조선 사업의 생태계를 구축해 나가며, HD현대의 중장기 성장 기반을 마련하는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 회장은 디지털·인공지능(AI)·로봇 전환을 아우르는 미래 첨단 조선소를 구축하는 데에도 집중하고 있다.
HD현대는 2030년까지 스마트 조선소 구축을 완료한다는 목표로 ‘미래 첨단 조선소(FOS)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2023년 FOS 프로젝트의 1단계로 ‘눈에 보이는 조선소’ 구축을 완료했고, 올해 2단계인 ‘연결·예측 최적화된 조선소’ 구축을 완료할 계획이다. 미래 첨단 조선소는 선박을 만들기 전 가상 조선소에서 선박 설계부터 생산, 유지보수에 이르는 전 과정을 시뮬레이션하고, 실제 건조에 앞서 생산 공정을 검증할 수 있다.
로봇을 활용한 생산 자동화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HD현대는 미국 페르소나 AI와 함께 조선소용 용접 휴머노이드를 공동 개발하는 한편, 올해 9월 국내 로봇 전문 기업 에이딘로보틱스의 지분을 인수하며 피지컬 AI 도입과 휴머노이드 시장 공략을 본격화하고 있다. 이를 통해 로봇 핵심기술을 확보하고 생산현장에 적용해 생산효율을 높이는 동시에 작업자의 안전 확보와 숙련인력 부족 문제 해결에도 기여한다는 구상이다.
SMR·수소 등 미래사업 시장 선점도 모색
정 회장은 조선업의 미래 경쟁력 확보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소형모듈원자로(SMR)와 수소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육성하며, 기존 조선·해양 분야에서 축적한 기술 경쟁력을 새로운 에너지 시장으로 확장하기 위함이다.
SMR 분야에서는 선제적인 투자와 기술 협력을 기반으로 가시적인 사업 성과를 창출하고 있다. HD현대는 2022년 미국 차세대 원전 기업 테라파워에 투자하며 SMR 시장 진출의 발판을 마련한 이후 2024년 원자로 용기를 수주, 올해 5월에는 차세대 나트륨 원자로 주요 설비 제작·공급을 위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이와 관련해 정 회장은 올해 8월 빌 게이츠 테라파워 창업자 겸 회장, 현대건설 경영진과 만나 차세대 나트륨 원자로 상용화 방안을 논의하는 등 글로벌 협력을 직접 챙겨 업계 주목을 받았다.
SMR 기술을 선박의 동력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기술개발도 본격화하고 있다. HD현대는 지난해 미국선급(ABS)으로부터 1만 5,000TEU급 원자력 추진 컨테이너선 설계에 대한 기본인증(AIP)을 획득하고, 선박 모델을 공개한 바 있다. 올해 3월에는 미국선급(ABS)와 1만6,000TEU급 컨테이너선에 적용할 원자력 연계 전기추진시스템 공동 개발에 착수했다. 최대 100MW급 SMR의 전력을 선박 추진에 활용하는 기술로, 차세대 무탄소 선박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행보다.
선제적인 생산 기반 구축에도 나섰다. HD현대중공업은 올해 9월 육상발전용 엔진 생산기지와 SMR 전용 생산시설 구축에 총 1조 722억 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약 8,336억 원을 투입해 육상발전용 힘센엔진 생산기지를 구축하고, 약 2,386억 원을 투자해 SMR 핵심 기자재 생산 역량을 강화할 계획이다.
HD현대일렉트릭 역시 AI 데이터센터 구축 등 글로벌 전력기기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약 4,000억 원을 투자해 북미 생산법인 기존 부지에 제2공장을 증설하고 있다. 이를 통해 HD현대는 AI 데이터센터 등 육상 발전시장과 차세대 원자력 에너지 분야로 사업 영역을 넓히고, 미래 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사업 포트폴리오 다각화에 나선다는 구상이다.
이밖에 HD현대는 수소 분야에서도 차세대 친환경 선박 기술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HD현대는 수소연료전지와 수소 운반·저장 기술 등 수소의 운송과 활용에 필요한 핵심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수소를 선박의 동력원으로 활용하는 기술과 해상 운송체계를 확보해 글로벌 해운산업의 탈탄소화에 대응한다는 계획에 따른 것이라고 HD현대 측은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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